수원화성은 조선후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그 무덤을 현재의 융건릉으로 옮긴후 인근에 건설한 신도신인 화성을 건설하면서 세운 성곽이다. 기존에 화강암으로만 쌓던 축성양식에서 벗어나 석축으로 쌓은 석성과 구운벽돌로 쌓은 전성의 형태를 지형과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섞어서 축성하였다. 축성 공사에는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것을 응용한 거중기가 사용하였으며,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성곽으로 그 축성과정이 의궤 등 다양한 자료에 상세히 남아 있고, 조선의 성곽 축성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원 화성는 서남쪽의 팔달산과 동장대가 있는 낮은 구릉을 연결한 평지성에 가까운 읍성이다. 성곽의 축성기술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성곽축성 형태인 석성을 기본으로 구운 벽돌로 쌓는 중국의 성곽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당시에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의 방어 시설을 곳곳에 반영하였다. 수원화성에는 동.서.남.북 4곳에 창룡문, 팔달문, 화서문, 장안문을 두고 있으며, 팔달산 정상과 동복쪽 구릉에 동.서 장대를 설치하였으며, 다양한 방어시설로 2곳의 노대, 2곳의 공심돈, 2곳의 수문, 2곳의 적대, 4곳의 각루, 11곳의 포루, 10곳의 치, 3곳의 암문, 봉돈, 용연, 용도를 두고 있다. 수원 화성안에는 국왕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을 두고, 화성 유수과 이 지역을 관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화성 행궁에는 남.북 군영 100명씩의 기병을 두어 기동력을 보강해 두고 있었다.
수원화성은 성곽 기술면에서는 중국의 성곽, 특히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을 방문할 때 처음보게 되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었던 천하제일관인 산해관의 성곽 모습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의 성곽축성 기술과 중국 전성의 장점을 조화롭게 적용한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군사 전략적인 면을 고려해 보면 당시의 발달된 화포의 능력을 고려해 보면 실제 전쟁이 발생시에는 군사적으로 큰 역할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군사적인 면에서는 고구려이래로 한반도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까지 가장 유용했던 산성이 더 실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수원화성은 정조가 국민들에게 화성행궁, 융건릉과 더불어 가시적인 결과물을 보여줌으로써 국왕의 권위들 더 높이고자 하는 정치적인 고려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1. 수원 화성의 성문 (장안문, 팔달문, 화서문, 창룡문)
수원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출입문이 있으며, 그 중에서 북쪽에 있는 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성문으로 서울에서 연결되는 도로를 통해서 국왕이 수원화성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며, 남쪽의 팔달문을 통해서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문중에서 팔달문과 화서문은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장안문과 창룡문은 전란 등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수원화성의 성문에는 벽돌로 쌓은 전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인 옹성을 두고 있다.
수원화성 정문이자 북문격인 장안문. 수원 화성 북쪽 출입문인 장안문은 서울의 숭례문보다 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오는 길과 연결된 장안문은 그래서 특이하게 북문임에도 정문으로 여겨지는 성문이다. 바깥쪽에는 옹성이 있고 팔달문과 함께 옹성에 별도의 출입문이 있다는 것이 화서문, 창룡문과 다른점이다. 조선시대에는 누각이나 궁궐 정전 건물은 보통 팔작지붕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이 곳 장안문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는 이층건물로 아마도 자금성을 포함한 북경의 주요 건물이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강대국을 표방하고자 했던 정조대왕의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한다.
수원화성의 남문격인 팔달문. 팔달문은 그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사통팔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수원화성의 남문이자 정문의 역할을 했던 성문이다. 서울을 남대문인 숭례문 주변에 남대문 시장이 있듯이 이 곳 팔달문 주변으로는 지동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이 꿋꿋히 자리잡고 있다. 팔달문은 아마도 북경에서도 제일 유명한 만리장성인 팔달령 만리장성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이며,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청나라 수도 북경을 많이 참조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서문인 화서문과 동문인 창룡문
2. 수원화성 동장대와 서장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하며 수원화성에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동북쪽 구릉에 위치한 연무대라고도 불리는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수원화성 동장대는 동문인 창룡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사이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장대이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가 화성 안밖을 감시하면서, 적과 화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조망하면서 지휘하는 장소라면, 서장대는 이 곳 수원화성에 주둔하는 병사를 모아놓고 훈련을 하거나 군사적인 집회가 이루어진 곳이다. 실제로 정조대왕 재위시절에 이 곳에서 많은 행사가 있었으며, 군사들을 모아놓고 무예를 수련하게 했었다고 하며, 그래서 연무대란 별칭이 붙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2층 누각으로 사방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곳이다. '화성장대'라고 쓴 글씨는 정조대왕이 친히 쓴 친필이라 한다.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화성행궁
행궁에서 올려다 본 서장대
3. 공심돈 (동북공신돈, 서북공심돈)
수원 화성은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실학자들이 동서고금의 성곽에 대한 기술을 연구하여 쌓은 조선시대 최고의 읍성으로 다양한 시설을 두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여러 시설물 가운데 하나인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인 돈대이다. 구운 벽돌을 쌓어서 만든 시설로 당시 정조대왕이 크게 자랑스러워했다는 시설이다. 아마도 중국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인 천하제일관의 문루와 돈대, 성벽 등의 시설을 보고 수원 화성 축성시 많이 참조해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수원화성에는 두곳의 공심돈을 두고 있다.
4. 노대 (동북노대, 서노대)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것으로서, 화성의 노대는 서노대와 동북노대의 2기가 동.서 장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후기까지도 조선에서는 쇠뇌가 중요하면서도 위력적인 무기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원화성에 설치된 동북노대와 서노대
5. 각루 (동남각루,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수원화성에는 동남각루, 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군사들의 휴식장소로 설치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치가 빼어난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정자의 기능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동북각류는 용연, 화홍문과 함께 있어 수원화성 경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여져 있으며, 꽃을 쫓고 버드나무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건물은 앞면3칸, 옆면3칸으로 팔각지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건물구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원화성 서북각루, 동남각루, 서남각루
6. 적대 (북서적대, 북동적대)
적대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좌우에 설치해 놓은 시설로 수원화성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하였는데, 팔달문 양쪽 적대는 없어지고 장안문 양쪽에 있는 적대만 남아 있다. 적대는 치성과 비슷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화포를 전시해 놓고 있는데, 화포가 들어갈 자리는 아닌것으로 생각된다.
장안문 양쪽에 설치된 북서적대, 북동적대
7. 포루 (동이포루, 동포루, 동일포루, 동북포루, 북동포루, 북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서포루1, 서남포사, 남포루)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단순히 치성위에 화포를 쏠 수 있는 누각을 설치한 것과 공심돈처럼 속이 비어 있는 치성위에 누각을 올린 것의 2가지 형태가 있다. 수원화성에는 총 11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단순히 치성 위에 누각을 올린 포루. 동이포루, 동일포루, 북포루, 서포루1가 있다.
동포루, 동북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는 공심돈처럼 속이 빈 돈대 위에 포루를 설치해 놓고 있으며, 공심돈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포루를 설치해 놓고 있다.
8. 치성, 치 (동삼치, 동이치, 동일치, 북동치,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용도동치, 용도서치, 남치)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한 시설물로서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는 꿩을 말하는 것으로서, 능히 자기 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그 뜻을 따서 치성이라고 하였다.
수원화성에 있는 10개의 치. 동삼치, 동이치, 동일치, 북동치,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용도동치, 용도서치, 남치가 있다.
9. 수문 (화홍문, 용연, 남수문터)
화홍문은 수원화성 북수문의 별칭으로 수원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수원천이 성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수원 화성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북수문은 홍예라는 아치형의 수문이 7개이 있으며, 이 수문에는 옛날에 최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겨울이라 많은 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지만, 장마철이나 비가 온 후에 수문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장관이라 하여 수원팔경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이 북수문위에 세운 누각은 화홍문이라 하며, 누각 자체로는 뛰어난 건축물이라 할 수 없지만 일곱개의 아치형 수문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화홍분 동쪽으로는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인 방화수류정이 있고, 그 앞으로는 용연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수원화성 북수문인 화홍문. 수원화성 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수원화성 바깥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인 용연
용연에서 본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모습
지금은 없어진 수원 팔달시장 부근의 남수문터
10. 암문 (서남암문, 서암문, 북암문, 동암문)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출입구글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하여 설치된 문으로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수원화성에서 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서 장대 주변에 주로 설치되어 있다.
수원화성의 암문들. 서남암문, 서암문, 북암문, 동암문
11. 봉돈
수원화성을 성곽 창룡문을 지나서 2개의 포루와 치성을 지나면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군사시설인 봉돈을 볼 수 있다. 봉돈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제압하는 돈대의 기능과 수원화성과 다른 지역과의 통신을 담당하는 봉수대의 기능을 같이 하고 있기때문이다. 중국 청나라 건축의 영향을 받아서 벽돌로 쌓아 만든 봉돈은 아래쪽은 공심돈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위쪽에는 5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수원화성의 봉돈은 용인 석성산 봉화, 서해안 흥천대 봉화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수원화성 동쪽 성곽에 설치된 봉돈. 돈대 위에 구운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12. 수원 화성 용도
수원화성 팔달산 정상부에 위치한 서남암문을 나서면 남쪽 능선을 따라서 '용도'라 불리는 길이 있고, 길 양쪽으로는 화성의 성벽보다 낮은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다. 용도의 끝에는 서남각루라 불리는 누각이 있어서 사방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남각루에 올라서면, 수원 화성 팔달산 남쪽방면 경관을 감상하면서 쉴 수 있다.
수원화성 서남각루와 연결된 용도
13. 화성 성곽
수원화성 성곽은 석축을 쌓은 석성을 기본으로 하여 중요 시설에는 구운 벽돌을 이용한 전성의 축성 방법을 적용하였다.
수원 화성 성곽
14. 화성행궁, 장용외영 기병들이 주둔했던 남군영, 북군영
수원 화성행궁 입구인 신풍루 오른편에 위치한 건물군으로 수원 화성 장용외영 친군위가 숙직하던 북군영과 행궁의 잡무를 맡아 보던 집사청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에는 기병으로 구성된 장용외영의 핵심 병력인 친군가 수직근무하던 북군영과 남군영이 신풍루 좌.우에 자리잡고 있으며 각기 100명씩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화성행궁 출입문인 신풍루 좌.우에 있는 남군영, 북군영
사적 제3호. 수원성곽(水原城郭)이라고도 한다. 1789년(정조 13) 정조가 생부인 장헌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치소(邑治所)는 물론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주시킨 다음 축조하기 시작했다.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이와 관련한 시말(始末)과 제도, 의식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94년 2월부터 축조가 시작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둘레는 5,520m이다. 시설물로는 4대문인 팔달문·장안문·창룡문·화서문을 비롯하여 암문·수문·적대·공심돈·봉돈·포루·장대·각루·포사와 성신사·사직단·공자묘·행궁 및 그외 부속건물들이 축조되었다. 그중 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인데,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세운 것으로 속이 텅 비어 있어 망루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적대(敵臺)·각루(角樓) 등도 새로운 설비였으며, 옹성(甕城)까지 제대로 갖춘 완벽한 시설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거중기(擧重器)·활차(滑車) 등 근대적인 기기를 축성공사에 사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2년 6개월이 소요된 공사에는 기술자 1,820명이 투입되었으며, 석재 18만 7,600개가 채취·운반되었고, 벽돌 69만 5,000여 장이 소요되었다. 연일수는 37만 6,342일, 총경비는 약 87만 3,520냥과 양곡 1,500석이었다. 종래의 전통적인 축성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한국 성곽이 갖는 약점을 중국이나 일본의 축성술로 보완한 화성은 그때까지의 축성기법을 가장 잘 집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성곽발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35년 일본이 '수원성곽'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화성'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출처:브리태니커>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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