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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논산 개태사,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창건한 사찰

younghwan 2012. 2. 2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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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는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사찰로 936년(태조19)에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에게 항복받은 황산에 개태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하였다. 개태사는 초기에는 태조왕건의 영정이 봉안되고 주요 제사를 주관하는 등 중요한 사찰이었으나, 고려 수도인 개경과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조금씩 쇠퇴하였다. 조선 전기 세종대에 잠시 중흥기를 가졌지만 그 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창건한 개태사와는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김광영이란 여승이 옛절터에 묻혀 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그 자리에 절의 세운 것이라 한다. 현재 사찰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편이며, 한국 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 소속이 아닌 법상종 소속 사찰이라고 한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삼존석불을 모신 불전과 일제강점기 이후에 지어진 불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불전과 최근에 지은 큰 요사채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내에는 옛 개태사와 관련된 문화재로 보물 219호로 지정된 개태사지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개태사지 오층석탑과 석조, 철확 등이 있는데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개태사는 조선중기 이후에 폐사된 고려시대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논산에서 대전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에서 지역유력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의 역할을 하지 못해서 전란 이후에 복구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개태사 들어가는 길. 개태사는 호남지방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길이자, 논산과 대전을 연결해주는 1번국도변에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에 호남선 철도 개태사역이 있다. 교통요지에 들어서 있었던 전형적인 고려시대 사찰의 입지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개태사는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창건한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일제강점기에 개인이 세운 사찰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 내부에는 옛 개태사와 관련된 문화재들이 여러점 남아 있다.


개태사의 주불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법당.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219호)을 모시고 있는 불전으로 조계종 사찰과는 달리 극락대보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자체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 문화재로서 의미를 갖는 건축물은 아니다.


개태사 오층석탑. 원래 개태사 옛 절터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기단부와 5층의 지붕돌,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고, 탑신만이 남아 있는 형태이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아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태사 오층석탑 탑신과 지붕돌

개태사 오층석탑, 고려시대
탑은 부처님의 사리나 유품을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이나 후에는 가람배치상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탑은 개태사지 제일 북쪽 건물지에 있던 것을 현 개태사 경내에 옮겨 놓은 것이다. 1층의 탑신 이하와 5층의 지붕돌 이상은 없어져 최근에 1층의 탑신과 기단부 및 보주 등을 새롭게 만들어 복원한 것이다. 지붕 돌은 4단의 층급받침에 약간 치켜진 처마를 지녔고, 네 귀의 반전이 아름답다. 상륜부에는 보주만이 올려져 있는데, 탑 앞에 있는 앙련의 석재도 이 탑의 상륜부 부속석재로 보여진다. 이 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출처:논산시청>


일제강점기에 이 곳에 절을 세우면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법당 건물. 전통 사찰의 불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팔각정 형태로 지어진 불전



개태사 철확. 옛 개태사의 규모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유물로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개태사에서 유명한 유물이었던 것 같다.


이 철확은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개태사 전성기에 된장을 끓이던 솥이었다고 한다.

개태사 철확, 고려시대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커다란 철제 솥이다. 창건 당시 주방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전하는데 개태사가 폐허가 되자 벌판에 버려져 있다가 조선 고종 24년(1887)에 있었던 정해년의 대홍수로 약 2km 정도 하류로 떠내려 왔던 것을 최근에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형태는 마치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형 모자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약 23cm 높이의 곧바로선 테두리가 솟아 있고, 그 아래로 20cm 정도의 경미한 경사면을 이루다가 다시 둥글게 급경사를 이루면서 바닥에 연결되고 있다. 두께는 3cm 정도이며, 외부의 밑바닥은 직경이 약 90cm의 둥근 굽이 있어 불이 효과적으로 잘 받도록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개태사의 전성기 된장을 끓이던 솥이었다 한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요사채는 불전 규모에 비해서 꽤 큰 편으로 이 곳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개태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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