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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박물관] 임진왜란의 기록, 부산진순절도(보물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392호)

younghwan 2012. 3. 1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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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년)부터 7여년간 왜군의 2차에 걸친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을 말하며, 중국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던 조선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를 오다노부나가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한 직후로 전국시대로 통해 많은 전투경험과 잉여병력, 힘이 넘치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사회전체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졌기때문에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은 조선초부터 오랜 기간동안 왜구의 침입을 제압하기 위한 기본 목표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이며, 훈련과 기강 또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 개전초 지상의 육군이 전패한 것에 비해서 수군이 적절히 연안수로에서 왜군을 제압했기때문에 전쟁기간이 7여년을 끌었던 것으로 보며, 명나라의 참전으로 왜군은 큰 소득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저술로는 충무공의 난중일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내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은 징비록을 비롯하여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육군박물관에서는 임진왜란을 기록한 문서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의 문집, 의병장 고경명, 곽재우, 조헌 등의 문집도 소장전시하고 있다. 이외에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그림인 보물 391호인 부산진순절도와 보물 392호인 동래부순절도를 볼 수 있다.



부산진순절도, 보물 391호, 1760년, 변박 개모, 임진왜란 개전초인 1592년 4월 부산진에 침입한 왜군에 맞서 부산진첨절제사 정발 이하 군.민이 최후까지 항전하는 광경이다.


이 그림은 숙종대에 처음 그려진 그림으로 내용이 사실적이거나 그림으로서의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나, 임진왜란을 기록한 전쟁기록화로서 그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동래부순절도와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장면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비단바탕에 그려진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에 처음 그려진 것을 화가 변박(卞璞)이 영조 36년(1760)에 다시 그린 것인데 처음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곳에서 전투장면을 내려다 보듯 묘사하였는데, 그림 오른쪽 중간에 부산진 성곽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을 왜병 및 왜선이 빈틈없이 에워싼 모습은 아군과 적군의 심한 전력의 격차를 보여준다. 그림의 작품성은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되지는 않으나, 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정기를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동래부 순절도, 보물 392호.


이 그림은 숙종대에 처음 그려진 그림을 영조36년 화가 변박이 다시 그린 그림으로 동래성이 함락되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곽 중심 관아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순절하는 동래부사 송상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선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고 구도나 형태, 필치 등에서 경직된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임진왜란 때의 유성룡의 간찰, 16세기말, 임진왜란 중에 영의정 서애 유성룡이 절도사 이빈에게 보낸 편지. 서애 류성룡은 영의정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병을 요청하고 전쟁을 지휘하여 7년간의 전쟁을 무리없어 적절하게 대처하였다.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병자호란과는 달리 초기의 완패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대처하여 국난을 극복하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김성일의 시문집 학봉집, 1851년. 학봉 김성일의 시문집으로 원집 7권은 효종 때, 속집 5권은 정조 때, 부 4권은 철종 때 간행됨. 학봉 김성일은 사신으로 일본으로 파견하여 일본의 침입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하여 후대에 폄하되었지만, 실제로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국의 의병을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행정적,정치적 측면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 공적록인 창의록, 1858년, 임진왜란의 의병장 고경명의 공적을 기린 책으로 7대손 고건헌이 서문을 작성함.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의 망우선생 문집, 16세기, 목판본 3책,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곽재우의 문집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의 문집인 중중집, 16~17세기,


거북선을 그린 그림, 귀선도, 각 면마다 각기 다른 4척의 거북선과 4척의 배를 그린 그림


서찰


장양공 이일의 정토시전부호도, 1845년(헌종11),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1588년(선조21)여진족 시진마을을 소탕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로 손자 이견이 제작한 것을 이재관(8대손)이 개모한 그림임.


정묘호란 때의 안주성 순절도, 조선후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3만의 후금을 맞아 안주성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평안병사 남이홍과 박명룡, 김준, 이상안, 전상의, 이희건, 송도남을 그린 그림.


수문장계회도, 18세기, 수문장들의 계모임을 그린 그림


평양성 일대를 그린 기성도, 19세기. 평양시가지와 자연환경를 지도산수체로 나타낸 그림으로, 평양성의 중요기관들이 총망라(약 220개)되었으며, 연결식 병풍으로 꾸며졌음. 작자미상이나 통례로 기성도는 당대 대가들의 탁월한 솜씨로 그려짐


한용운의 글씨 풍상세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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