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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안성 봉업사지, 고려 태조 진영을 모셨던 고려시대 절터

younghwan 2012. 3. 2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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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업사지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옛 죽산도호부 관아가 있던 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이 곳에는 현재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옛 절터였음을 알 수 있고,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비봉산 아래 봉업사'라는 기록과 <고려사>에 '공민왕이 죽주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1966년에 '봉업사'라는 사찰이 이름이 적힌 향완과 반자가 발굴되어 기록에 남아 있던 봉업사가 이 곳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봉업사가 위치한 죽산면 일대는 중부내륙지방인 충주와 청주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이며, 봉업사 뒷편에는 이 교통로를 지키는 방어시설인 죽주산성이 있다. 조선시대 죽산에는 종3품 부사가 고을수령인 죽산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봉업사 절터는 관아와 가까운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교통로에서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역.원의 기능을 겸했던 고려시대 사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절터이다.

 업사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호암미술관에서 소장중인 보물 1414호로 지정된 봉업사명청동향로와 연세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576호로 지정된 '봉업사명 청동북', 인근 칠장사로 옮겨진 보물 983호로 지정된 '봉업사 석물입상'을 비롯하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중인 명문기와, 막새, 청자편 들이 있고, 죽산리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옛 절터에 남아 있다.

 

안성 죽산면 죽산리 국도변에 위치한 고려시대 큰 사찰이었던 봉업사지 옛 절터

 

이 곳이 옛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죽산리 당간지주.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당간지주는 장식을 하지 않은 소박한 형태로 고려시대 당간지주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불교 용구인 당을 달기 위한 당간을 고정해 주는 두 개의 지주대를 말한다. 주로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돌이나 철로 만든 것이지만 예전에는 목재를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위치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8년에 복원한 것으로 높이 4.7m, 폭 0.76m, 두께 0.5m로 약 1m 거리를 두고 한 쌍이 서 있는데 아무 장식이 없는 소박한 형태이다. 남쪽의 기둥은 윗부분이 약간 깨져 나간 상태이며 당간지주의 윗부분은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직사각형의 구멍이 만들어져 있다. 건립 시기는 안성 죽산리 5층 석탑(보물 435호)와 같은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출처:안성시청>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단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는 정형화된 고려시대 5층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부가 단층인 대신에 탑신 1층 몸돌이 다른 층에 비해서 크게 만들어져 기단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가 왜소한 편으로 전체적인 균형미는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기단부나 탑신의 몸돌에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고 있으며,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고 1층 몸돌에는 불상 등을 안치하는 작은 감실이 있을 뿐이다. 석탑의 조각수법이나 비례 등 전체적인 조형미가 많이 떨어지고 정형화된 양식의 고려초기 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석탑이다.

 

당간지주 사이로 보이는 죽산리 오층석탑.

 

죽산 봉업사지 옛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오층석탑만이 남아 있고 옛절터 대부분은 현재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죽산도호부가 설치되었던 죽산면 소재지에 위치한 봉업사 옛절터에 남아 있던 고려초 불상인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은 높이 1.57m로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다. 눈,코,입 등은 심하게 닳았으며, 옷주름은 여려겹으로 자연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다. 고려초기에 만든 다른 석불입상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신체비례가 적절한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다. 이 불상은 고려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역의 불상양식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는 오층석탑, 당간지주와 함께 봉업사 옛절터에 있던 것을 죽산면에 소재한 오래된 사찰인 칠장사 대웅전 옆으로 옮겨 놓고 있다.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는 봉업사지 옛절터

 

'태평흥국7년' 명 기와, 고려, 982년, 안성 봉업사지에서 출토된 암키와이다. 기와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태평흥국 7년 임오 2월 죽주에서 수(인), 수(오) 등이 모두의 힘을 합하여 불사를 하였다.'이다. 안성 봉업사지와 관련하여 연대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봉업사지 옛 절터 전경

 

이 사지는 죽산면에서 일죽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편으로 넓은 뜰이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업사지의 사명(寺名)이 확인된 것은 1966년 경지정리작업 중 출토된 향완과 반자에 새겨진 명문 때문이다.향완과 반자의 발견으로 고려사에 나오는 죽주의 봉업사가 현재의 봉업사지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이 1363년(공민왕 12년) 죽주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봉업사는 절 이름 그대로 나라를 창업한 것을 기념하여 창건된 호국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기로 올라가며 창건 당시의 사명은 화차사(華次寺)였음이 1997년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명문기와를 통해 확인되었다. 봉업사는 진전사원으로 고려시대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사찰이었다. 현재 봉업사지에 남아있는 유물로는 죽산리 오층석탑(보물 435호), 죽산리 당간지주(유형문화재 89호)등이 있으며, 칠장사로 옮겨진 안성 봉업사지 석불입상 등이 있다. 봉업사는 경기도 박물관에 의해 3차례에 걸쳐 발굴이 진행된 바 있다. 봉업사에 대한 1, 2차 발굴은 1997년과 2000년에 실시되었으며, 당시 峻豊銘 기와 등 명문기와와 막새, 청자, 중국 자기들이 다량으로 출토된 바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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