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시 하성면 애기봉 전망대로 가는 길에 보이는 사당인 한재당이다. 조선중기 문신 이목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구한말인 헌종14년(1848)에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은 1974년 중건하면서 콘크리이트로 지었기때문 전통 건축물로서 의미는 없지만 조선후기 양식이 남아 있는 사당이다. 원래는 일주문과 담장으로 둘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담장과 내.외삼문으로 둘러져 있고 마당 한쪽에는 정자가 세워졌다.
이목은 조선 중기 성종~연산군대의 문신으로 조선시대 사림세력을 이끈 김굉필.정여창과 함께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25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때 처형되었으며, 갑자사화때 다시 한번 부관참시되었다고 한다. 평소에 바른말을 잘 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성균관 유생시절 무당을 쫓아낸 일과 숭불론을 주장한 훈구대신을 탄핵하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러차례 사화를 거치면서 중종대 이후 집권세력으로 부상한 사림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다.
한재당,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한재당은 연산군대의 문신으로 성종에게 숭불론을 주장한 윤필상을 논박한 상소로 귀양을 갔고 무오사화 때 모함을 받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임을 당한 이목(1471~1498)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목은 김종직의 제자로, 연산군 원년(1495)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바른 말을 잘 하기로 소문이 났으며, 성균관 유생시절에는 왕대배가 성균관에 음사를 설치하여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쫓아낸 적도 있으며, 숭불론을 주장한 훈구대신 윤필상을 탄핵하다가 공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무오사화 때 중임을 당한 뒤, 다시 갑자사화 때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거는 부관참시형을 받았다. 나중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간공이다. 헌종 14년(1848)에 사당이 건립되고, 1974년에 다시 개축을 하였다. 개축을 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모양에는 손실이 있었으나, 건물의 배치 등에는 아직 조선의 전통적인 사당 건물의 형식이 남아 있다. <출처:김포시청>
한재당 전경. 1970년대에 중수한 사당으로 원래는 일주문이 있었는데, 수리과정에서 전형적인 사당 출입문인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으로 바뀌었다.
사당 입구 홍살문과 외삼문
외삼문에서 내삼문으로 이어지는 길.
마당 한쪽편에 세워진 정자. 원래 사당, 재실, 서원, 향교 등에는 이런 형태의 정자를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곳을 찾는 사람이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편의시설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목조건물이었던 것을 콘크리이트로 복원한 사당.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 관리인이 거주하는 살림집
사당 뒷편 무덤
애기봉으로 들어가는 길
사당 앞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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