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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 삼년에 걸쳐 쌓았다는 삼국시대 신라의 성

younghwan 2010. 9. 2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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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읍내에 자리잡고 있는 삼년산성은 우리나라에 몇개 남지 않은 신라시대 산성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납작한 돌을 층층히 쌓아 거대한 산성을 쌓았다. 보기에도 매우 튼튼해 보이는 이 성은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할 때 교두보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그만 돌로써 쌓은 형태로 보아서는 고구려 산성이 형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를 개량해서 매우 튼튼하게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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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의 성벽입니다.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성벽과는 달리 조그만 돌로써 매우 촘촘하게 쌓았습니다.성문은 남아 있지 않고 출입구만 있습니다. 성벽의 두께가 매우 두꺼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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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라서 삼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튼튼하게 성벽을 쌓았습니다. 반면 고려시대 이후에는 전략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지역으로 생각되어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문등의 시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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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에서 본 삼년산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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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에서 식수를 공급하던 연못입니다. 규모가 꽤 큰 연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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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쪽의 성벽입니다.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때문 남쪽보다는 튼튼하게 쌓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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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 안내도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출처:문화재청>
둘레 1.68㎞. 사적 제235호.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세 봉우리와 서쪽 골짜기를 잇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이루고 있으며, 산은 높지 않지만 꼭대기에서 바라보면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470년(자비왕 13)에 축조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오정산성이라고도 했다. 성벽은 납작한 판돌로 한 켜는 가로로 놓고 다음 한 켜는 세로로 놓아 우물 정(井)자처럼 엇물려 쌓았다. 특히 기초를 견고히 하여 하중을 잘 견딜 수 있게 했으며, 성벽이 높은 곳은 13m에 달한다. 동서쪽 성벽은 바깥쪽에 돌을 쌓고 안쪽에 흙으로 다진 내탁외축(內托外築) 방식이며, 남북쪽은 안팎에 돌을 쌓고 그 안에 돌을 채운 내외협축(內外夾築) 방식이다. 성문터는 동서남북 4곳에 있으며, 서문터에는 너비 165㎝ 간격의 홈이 패어 있어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7개소의 옹성(甕城)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했다. 수구는 서쪽 성문 옆 계곡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각형의 수문이 동쪽 성벽에 남아 있다. 우물터는 5개소가 있었는데, 그중 아미지(蛾眉池)라는 곳이 유명하다. 이 산성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조선 시대에 걸친 기와·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줄곧 이용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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