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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김해김씨와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능 (김해 수로왕릉)

younghwan 2010. 9. 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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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김해에 자리잡고 있는 수로왕릉입니다.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을 모신 왕릉인데 가야시대의 고분의 모습이 아니라 조선시대 왕릉을 보는 것 같습니다. 왕릉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인도와 관계되었다는 쌍어문과 파사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답게 관리가 아주 잘 되고 있어 신이 다니는 삼도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고, 왕릉 안쪽으로는 출입을 할 수 없게되어 있습니다.

※ 수로왕릉 탐방
 1. 수로왕릉 들어가는 길 - 홍살문, 가락루, 시생대
 2. 수로왕릉 - 남릉정문(쌍어문), 왕릉
 3. 가야왕의 신위를 모신 숭안전, 수로왕의 신위을 모신 숭선전, 안향각

김해에 자리하고 있는 수로왕릉입니다. 왕릉의 크기는 동시대의 경주에 있는 왕릉이나 고령 대가야의 고분에 비해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양식도 통일신라 이후 왕릉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조선시대에 주위를 정비한 것 같습니다.

수로왕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문인석입니다. 신라 괘릉 이후의 중국 왕릉의 형식을 받아들인 전형적인 조선시대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로왕릉의 정문격인 남릉정문입니다. 위쪽에 물고기자리를 상징하는 쌍어문과 인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파사석탑의 문양이 그려져 있어서 그런것 같습니다.

담너머로 보이는 수로왕릉입니다.

수로왕릉 앞에 있는 제물을 올리는 시생대와 그 우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숭신각입니다. 조선 왕릉의 일반적인 형태와 비슷합니다.

수로왕릉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고목입니다. 조선시대에 심은 것으로 보입니다.

수로왕릉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홍살문입니다. 홍살문 가운데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지나가지 못하게 푯말이 있습니다.

수로왕릉의 정문격인 가락루입니다. 수로왕릉은 조선시대 정비되어서 그런지 대부분 조선후기 형식의 건물들이 있습니다.

가야 왕들의 신위를 모신 숭안전입니다. 종묘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신도와 품계석이 마다에 있습니다.

수로왕릉 옆에 자리한 숭선전과 안향각입니다. 숭선전은 수로왕과 허왕후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 가락국2대 도왕 원년(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987년 현위치로 이전되었다합니다.
안향각은 춘추대제제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과 축을 봉안하는 곳으로 1792년에 창건되었고, 1932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음. 지금도 김해김씨가 인구의 10%정도되고, 조선시대에서 그 인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조정에서 제사의 쓸 향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수로왕릉 내 각 건물들 간에 출입하는 출입문들입니다.

안내표지판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이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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