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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

younghwan 2013. 3. 1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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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 명륜당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문묘)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공간의 중심이 되는 강당 건물이다. 성균관은 서원의 건물배치에서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교육공간인 강당건물을 뒷편에 배치하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는 데 이는 평지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위상이 높은 대성전을 앞쪽에 두었기때문이다. 지방 향교도 성균관의 건물배치와 격식을 따랐는데, 대부분 경사진 언덕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대성전이 뒷편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평지에 자리잡은 큰 규모의 향교인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균관에는 전국의 진사, 생원 중 200명 한도로 엄격하게 선발하여 기숙사인 동.서재에 머물고 공부하였다고 한다.

 명륜당은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태조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39년(1606)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대에 경북궁 중건과 함께 크게 수리하였다. 건물은 중앙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강당건물과 양쪽에 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협실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앞쪽으로 넓을 월대가 있다. 협실은 앞면 3칸반, 옆면 2칸의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 추녀마루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잡상들이 있어서, 국가적을 아주 중요한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아침에 명륜당 월대 아래 마당에서 예를 올리고 강당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명륜당 월대 앞 마당에서는 과거시험을 치루는 과거장으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상징적인 건물로 주변 동네 이름도 명륜동이라 불린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동무.서무.삼문.명륜당), 보물 141호, 1398년(태조7) 건립, 1869년(고종6)중건,
이 건물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의 중심시설이다. 대성전, 동무와 서무, 삼문은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으로 문묘라 하고, 명륜당은 교육 공간의 중심 건물로서 동재 및 서재 등과 함께 성균관을 구성한다. 2398년(태조7)에 이 건물들을 세웠으나, 1606년(선조39)에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96년(고종6)에 이를 크게 수리한 것이다. 대성전은 제사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그 내부의 중앙과 좌우에는 유학자들의 위패를 순서대로 모셨다. 그리고 대성전에 모시지 못한 위패는 동무와 서무에 모셨다. 삼문은 이곳들로 드나드는 출입구인데, 그 가운데 문은 신령이 지나는 곳을 상징한다. 제사 공간의 뒤쪽에 위치한 교육 공간의 중앙에 명륜당이 있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명륜당은 가운데 큰 건물과 좌우의 작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건물은 모두 마루로 되어 있고 좌의 건물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 기관의 제도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특히 그 건축물의 규모와 격식은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는 일반 향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서울 문묘의 특징이다. <출처:서울시청>


성균관의 강의실이라고 할 수 있는 명륜당이다. 중앙에 강당이 있고, 좌우로 협실을 두고 있습니다. 전면에는 월대가 돌출되어 있는 구조로 궁궐 전각과 비슷한 구조이다.

성균관 명륜당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을 두었는데, 강당은 정면 3간(間) 측면 3간(間)이고, 좌우 협실은 각각 정면 3간반(間半) 측면 2간(間)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으로 결구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 양측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 두 협실은 명륜당 벽으로부터 정면 2간반(間半)과 측면 2간(間)은 대청이고, 나머지 정면 1간(間) 측면 2간(間)은 온돌방이다. 이들 두 협실은 장대석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초익공으로 결구하였다. 지붕은 겹처마로 명륜당 쪽은 맞배지붕이나 두 끝단에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나주향교·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온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뒤 벽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200명을 한도로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출처: 성균관>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진 가운데 강당건물.


명륜당 현판. 글씨는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온 학사 주지번의 글씨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강론을 듣는 강의실이라 할 수 있는 강당의 넓은 대청마루. 천정아래에 글들이 적혀 있는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강당 천정은 서까래와 보가 들여다 보이는 연등천정. 글들이 적힌 크고 작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안쪽 '명륜당'이라고 적힌 현판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강당 천정에 걸려 있는 현판들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현판이 걸려 있다.


2009년 강당문이 닫혀 있을 때의 모습


명륜당 강당


강당 추녀마루 잡상.


강당 앞에는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은 넓은 월대가 있다. 궁궐 전각의 격식을 갖춘 건물 구조로 이곳에서 국왕이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강론을 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룰때 사용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매일 아침 월대 아래에서 예를 올리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월대 돌계단


월대에서 내려다 본 성균관 마당


명륜당 오른쪽 협실. 앞면 3칸 건물로 2칸은 대청마루,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협실 대청마루 내부


왼쪽편 협실


2009년 문이 닫혀 있을 때 좌.우 협실


2013년 봄 성균관 명륜당


2009년 봄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명륜당. 이곳 마당에서는 주말 전통혼례가 치러진다.


2009년 봄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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