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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44

천안 천흥사 절터와 당간지주(보물99호)

천흥사지는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성거산(해발579m) 서북쪽 계곡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천흥계곡에 둑을 쌓고 저수지를 조성하면서 절터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천흥리 마을 입구에 남아 있는 천흥사지 당간지주(보물99호)와 저수지 둑 아래에 위치한 오층석탑(보물354호)이 이곳에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천흥사 창건과 내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중인 천흥사지 동종(국보280호)에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주조한 천흥사 종이라는 글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없지만 당간지주나 오층석탑의 형태 등으로 볼 때 고려가 건국되었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에 세웠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사찰입구에 세웠던 당간지주와 ..

절터 2014.08.12

북한산 중흥사지, 북한산성 승군을 총지휘한 승대장이 머물던 사찰 절터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있던 중흥사는 북한산성을 지키던 승군들이 머물던 사찰 중 가장 큰 사찰이었다. 중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원증국사가 머물때 중수하면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원래는 그리 크지 않았던 사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의 방어를 위해 숙종이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산성을 지키고 수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승군들이 머물 수 있도록 크게 중수하였다고 한다. 사찰이 1915년 대홍수로 무너지기전까지 136칸에 이르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중흥사에는 북한산성을 지키던 승군들이 머물던 11개의 사찰을 지휘하던 승대장이 머물던 승영으로 승대장은 전국 승병을 지휘하는 팔도도총섭을 겸임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로 호국불교로서 ..

절터 2013.05.13

강릉 굴산사지(사적448호)와 당간지주(보물86호), 통일신라 선종사찰인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굴산 굴산사 절터

굴산사지는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남아 있는 옛 절터이다. 굴산사는 통일신라후기 범일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크게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후기 선종을 크게 전파한 구산선문 사찰 중 하나이다. 범일국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동안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고 전파하였다. 구산선문은 기존 교종의 교리 중심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주는 본래 의미를 전한다는 선종의 성격을 갖고 있다. 통일신라말기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유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의상대사의 화엄십찰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불교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굴산사는 후삼국시대 세력균형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

절터 2012.08.23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실] 경주지역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 유물 (고선사지, 영흥사지, 임천사지)

삼국시대 신라는 불교가 제일 늦게 전래되었지만, 법흥왕대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신라의 불교은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하여 불교를 통해 국민을 단합시키는 역할이 컸다다. 호국불교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 사천왕사의 건립 등을 들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삼국의 불교문화가 융합되어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신라 천년이 수도였던 경주에는 지금도 불국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찰들이 남아 있지만, 전성기에는 상당히 많은 사찰들이 국가를 비롯하여 귀족집단들이 주도하여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칠처가람이라 불리는 흥륜사, 담엄사, 영흥사, 분황사, 사천왕사, 황룡사, 영묘사 들이 있었으며, 삼국을 통일한 이후 화려한 불교예술을 보여주는 불국사..

절터 2012.07.19

경주 사천왕사지 (사적8호), 문무왕이 당나라를 물리치고자 낭산에 세웠던 사천왕사 절터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사적 8호로 지정된 사천왕사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이다. 사천왕사는 679년(문무왕19)에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은 신라인이 신성시여기던 경주 낭산 남쪽 끝 자락으로 경주에서 울산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다고 하며,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입구를 지키던 천왕들로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수미산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예언이 실현시켜준 사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사천왕사는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사천왕사 절은 없어지고 남북..

절터 2012.07.13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 (보물 909호)와 절터

남간사지는 경주시 탑동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탄생신화가 있는 경주 나정에서 남산 북쪽편 남산신성이 있는 해목령으로 들어가는 길에 위치한 남간부락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이 절의 창건 연대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신라 애장왕때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었던 자리에는 남간 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고 당시 절에서 사용한 초석이나 축대 등을 민가건물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석조가 남아 있다. 절터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사찰입구임을 알려주는 보물 909호 지정된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같은 형태와 크기로 마주 서 있는 당간지주에는 아래 위에 둥근 구멍을 뚫었고 안쪽에 +자 모양의 홈을 판 것이 특징이다. 이..

절터 2012.06.29

경주 영흥사 절터, 신라의 신성한 숲인 천경림에 세웠던 사찰인 칠처가람 중 하나

영흥사는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신라의 사찰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인 천경림에 지었던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이 절은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유사 기록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법흥왕대에 있었던 사찰로 보인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으로 이차돈의 순교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웠기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차돈은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기는 숲에 절을 지어서 귀족들이 반발했는데, 이후에 이들 천경림에 지은 숲을 칠처가람이라고 하며, 그 중 서쪽을 중요시해서 그런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비롯하여 영흥사, 담엄사, 영묘사 등이 경주도심의 서쪽 형산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룡사와..

절터 2012.06.26

경주 흥륜사지 (사적 15호),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출토된 영묘사 절터도 있었다고 알려진 신라 칠처가람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대인 527년이며, 당시 신라 귀족들의 반발로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되었다. 당시 신라귀족들이 반발한 것은 이차돈이 당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인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당시에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불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받아들이기 위해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에 세웠던 사찰을 신라 칠처가람이라고 하는데 경주 도심 동쪽편의 분황사와 황룡사, 서쪽편 형산강변에 위치한 담엄사, 영묘사, 영흥사, 흥륜사가 있고, 낭산자락에는 사천왕사가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천경림에 절을 세움으로서 신라는 빠른 시일내에 불교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중 경주시 사정동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절터 2012.06.24

경주 보문동사지(사적390호), 보문사지석조(보물64호)와 당간지주, 금당터가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

경주시 보문동 농경지 한가운데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인 보문동사지이다. 절터에서 보문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에 보문사라는 절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문헌상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처음 건립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금당터, 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 배치와 주춧돌, 축대 등 석제 유물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조성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보물 64호로 지정된 물을 담는 그릇인 석조를 비롯하여 출입문 방향으로 추정되는 서쪽편에는 보물 123호로 지정된 보문리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보문동사지가 있는 경주 보문동은 경주도심에서 남동쪽으로 명활산성과 경주 낭산 사이의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를 건국한 연맹체였던 신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절터 2012.06.18

경주 천군동사지 (사적 82호), 보문관광단지 근처에 남아 있는 절터

경주 보문관광단지 동쪽편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인 천군동 마을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인 사적 82호로 지정된 천군동 절터이다. 현재는 보물 186호로 지정된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인 천군동 동.서삼층석탑과 주춧돌 등이 절터에 남아 있다. 문헌이나 자료에 이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지명을 따서 천군동사지라고 부른다. 이 사찰의 가람배치는 2개의 탑을 중심으로 중문, 금당, 강당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금당.강당.중문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출토 유물은 건축부재 외에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천군동사지가 있는 천군동 마을은 지금도 경주와 동해안 감포, 포항 등을 연결해 주는 4번국도..

절터 2012.06.16

경주 천관사지(사적 340호), 김유신장군이 천관녀를 위해 세웠다는 천관사 절터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사적 34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절터인 경주 천관사지이다. 천관사는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과 기생 천관의 전설이 얽혀 있는 곳으로 농경지 가운데 석탑의 기단석 등이 논 가운데 남아 있던 곳이라고 한다. 오랜기간동안 농경지로 사용된 곳이라 건물터 등을 확인할 수 없어 전체적인 사찰의 규모나 가람의 배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천관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도당산 서쪽기슭이라고 하며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의 집이 있던 곳에 삼국통일 이후에 천관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한다. 절터는 경주 오릉 동쪽편 들판 한 가운데 있으며 북쪽으로 경주의 궁성이었던 월성 남쪽을 흐르던 남천이 흘러가고 있다. 김유신의 집터로 알려진 재매정에서 남쪽으로 500여m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

절터 2012.06.12

경주 원원사지(사적46호), 통일신라 밀교의 중심이 되었던 사찰터

사적 46호로 지정된 원원사지는 신라의 수도 경주의 남쪽 관문성 안쪽 경주 도심에서 20여km 정도 떨어진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지금은 보물로 지정된 2개의 3층석탑과 부도만 남아 있고, 후대에 새로 지어진 사찰인 원원사가 절터 앞쪽에 자리잡고 있다. 절터에는 금당이 있었던 자리와 건물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만 몇개 남아 있다. 사찰의 형태는 산중턱에 터를 조성하고 탑과 건물을 세운 형태로 선종 계열의 사찰인 설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절터이다. 탑의 형태 또한 기단부에 8부중상이나 12지신상을 부조로 새겨 놓고 있는데, 이런 탑의 형태는 9세기경에 유행했다고 한다. 원원사지는 전통적인 쌍탑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부조상으로 장식하는 전..

절터 2012.06.08

양양 선림원지, 백두대간 구룡령을 넘어가는 길목 미천골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엣 절터

양양 선림원지는 양양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인 구룡령아래 미천골 계곡이 끝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이 곳 지명이 '쌀을 씻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는 뜻이 미천골이라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선림원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던 사찰이었고, 이 곳 선림원 부근에서 하루를 묵고 구룡령을 넘어갔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림원은 그 이름에서 느끼기에는 고려시대 교통로에 있었던 여관 기능을 했던 사찰로 이해하기 쉬우나, 원래는 통일신라시대 홍각선사가 세웠던 승려들이 수도하던 선종계열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부근에 위치한 양양 진전사와 함께 설악산의 맑은 산수와 드넓은 동해바다를 가까이 하면서 수도를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일찌기 선종계열의 사찰이 이..

절터 2012.04.02

안양 중초사지(안양사지) 절터, 명문이 새겨진 당간지주(보물4호)가 남아 있는 안양의 큰 절이 있었던 자리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옛 안양유원지) 입구에 위치한 제약회사 유유제약 공장은 통일신라 흥덕왕 2년(827)에 세워진 중초사와 고려 태조 왕건이 900년에 세웠던 큰 사찰인 안양사가 있었던 큰 절터이다. 지금은 공장 한쪽편으로 모아놓은 보물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고려시대에 세운 삼층석탑, 공원주차장 뒷편에 남아 있는 마애석종만이 이곳이 옛절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 곳에 소재한 유유제약 공장건물은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1959년에 지어진 것으로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공장건물을 안양시에서는 김중업박물관으로 활용할려고 했으나, 발굴조사 결과 옛 안양사 건물을 이루고 있었던 기와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굴되어 김중업이 설계한 일부건물만 남겨두고 발굴..

절터 2012.03.28

안성 봉업사지, 고려 태조 진영을 모셨던 고려시대 절터

봉업사지는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옛 죽산도호부 관아가 있던 지역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절터이다. 이 곳에는 현재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 오층석탑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옛 절터였음을 알 수 있고,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에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비봉산 아래 봉업사'라는 기록과 에 '공민왕이 죽주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1966년에 '봉업사'라는 사찰이 이름이 적힌 향완과 반자가 발굴되어 기록에 남아 있던 봉업사가 이 곳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봉업사가 위치한 죽산면 일대는 중부내륙지방인 충주와 청주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이며, 봉업사 뒷편에는 이 교통로를 지키는 방어시설인 죽주산성이 있다. 조..

절터 2012.03.27

경주 인용사지, 월성 남쪽 무열왕 둘째아들 김인문을 위해 세운 인용사 절터

경주 반월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인용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절터이다. 인용사는 삼국통일에 큰 공헌을 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김인문은 당시 볼모형태로 당나라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하며 당시 신라사람들이 그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인용사를 세웠다고 한다. 절터의 규모나 궁성 아래에 위치한 점 등으로 볼 때 김인문이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존경받았던 인물었던 것 같다. 경주 인용사지는 2002년 발굴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절터에 남아 있는 석물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사찰 가람배치 양식인 2개의 탑을 중심으로 금당, 강당, 회랑 등으로 ..

절터 2011.10.22

경주 황복사지, 낭산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신라 왕실과 밀접했던 황복사 옛 절터

국보 37호로 지정된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예전에는 '경주 구황리삼층석탑'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원래 이곳에는 삼국시대에 세워진 황복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나 삼층석탑을 제외하고는 옛절터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지명을 따서 불렀던 것 같다. 황복사는 652년 의상대사가 출가한 사찰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절의 내력을 보면 신라황실과 관련이 많은 사찰이었던 것 같다. 황복사는 불교가 처음 도입되던 시기에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에 세워진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등과 함께 낭산 북동쪽 끝 자락에 세워졌던 사찰로 보인다. 낭산에는 북쪽편에는 황복사, 미탄사, 남쪽편에는 사천왕사, 망덕사가 있었고 중앙에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과 남쪽편 정상부에 선덕여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황복사 ..

절터 2011.10.20

경주 장항리사지 (사적 45호), 토함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은 옛 절터

경주 토함산 불국사에서 석굴암을 지나 감은사지와 대왕암이 있는 감포해안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45호로 지정된 장항리 절터이다. 사찰의 내력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지 것이 없어서 양북면 장항리라는 지명을 따서 장항리사지라고 부른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동쪽편 기슭에서 있으며,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감은사지 앞을 지나서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 상류 계곡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에 두개의 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쌍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감은사지와 비슷한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석조불대좌가 있는 금당터는 확인되고 있으나, 강당과 회랑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236호로 ..

절터 2011.10.17

고성 건봉사지,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옛 절터

한국 전쟁으로 불타버리기전까지는 건봉사는 총 642칸의 건물 칸수를 자랑하던 전국 4대 사찰의 하나였다. 신라 법흥왕때 처음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이 사찰은 조선 개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 나옹화상이 크게 중수한 사찰이다. 세조가 건봉사를 원찰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하여 조선시대에는 양주 회암사와 함께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사찰로 임진왜란때에는 사명대사 의병을 이곳에서 기병하였고,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전통이 깊은 사찰이다.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건봉사는 북쪽편에 대웅전 영역, 남쪽편에 극락전 영역, 뒷편에 낙서암과 사리탑을 두고 있는 가람배치로 한때는 3,183칸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으나, 여러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

절터 2011.06.21

원주 흥법사지, 섬강변에 자리잡은 진공대사탑이 있었던 절터

원주 흥법사지는 원주시 문막읍에 여주방향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중의 하나인 88번 지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이다. 이 도로는 여주 고달사지로 연결되는데, 고려초 번성했던 남한강 주변 교통로에 있었던 큰 사찰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횡성에서 발원해 원주를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섬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기록상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찰은 고려초 태조 왕건의 신뢰를 받았던 진감선사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사찰로 조선중기까지 사찰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관이 빼어난 곳이라 조선후기에는 도천서원이 이 자리에 있다가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흥법사는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절터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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