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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156

함양 청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

연산군 때 학자이자 문인인 김일손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함양 청계서원이다. 조선시대 세워진 서원은 아니고 1907년에 세워진 사당 성격의 서원이다. 강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이 낮은 곳에, 사당을 높은 곳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남계사원과 거의 비슷하게 지어졌는데 건축적 측면에서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김일손(1464~1498년)은 조선 성종~연산군대 활동한 학자이자 관리로 남계사원에 모셔진 정여창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사관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란 글을 사초(史草)에 넣어 무오사화 때 희생되었다. 한때 이곳에서 ‘청계정사’를 세후고 후학들을 양성했다고 하여 지역 유림들이 그를 기리는 유허비와 서원을 세웠다. 목천 도동서원과 청도 자계서원에 모셔졌다. 함양 남계서원 옆..

함양 남계서원(사적 499호)

조선중기 학자이자 관리였던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사적 499호)이다. 이 서원은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아래쪽에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서재를 두고 위쪽에 사당을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구현한 서원으로 후대 세워진 서원들의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문루, 강당, 동.서재, 경판고(장판각), 내삼문, 사당, 전사청, 고직사 등 서원이 갖추어야 할 건물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서원건축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정여창(1450~1504년)은 성종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중기 사림세력을 이끌었던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때 여러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퇴계 이황과 제자들을 모신 호계서원(虎溪書院)이다. 조선 선조 8년(1575)에 백련사 절터에 여강서원(麗江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다. 1605년에 대홍수 유실되어 다시 지었으며, 숙종대에 호계로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없어졌다가 강당만 새로 지었다. 강당은 앞면 3칸이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앞면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원래는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와룡면 도곡리에 있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향후 안동댐 부근으로 옮길 예정이라 한다. 안동시 임하면 임하댐 아래에 위치한 호계서원.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과 제자들인 류성룡, 김성일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강당만 복원되었다. 원래는 도산서원과 멀지 ..

부여 흥학당,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 건물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 있는 흥학당(興學堂)이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 건물로 'ㄷ'자형으로 지어진 본채만 있고 행랑채 등 부속건물을 두고 있지 않다. 가운데 4칸은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 방과 부엌들을 두고 있다. 흥학당은 과천현감을 지낸 조태진을 모신 사당인 남산사 부속건물로 1770년에 지어졌다. 이 지역에 세거지를 두고 있는 풍양조씨 집안에서 지은 것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다. 뒷편에는 사당인 남산사(南山祠)와 영당(影堂)을 두고 있다. 흥학당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으로 지어졌다. 건물은 넓은 넓은 대청마루와 방, 부엌으로 된 본채를 제외하고 행랑채를 두고 있지 않다. 흥학당 출입문 흥학당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서당 건물이다. 가운데 4칸 넓은 ..

단군성전, 사직공원에 위치한 단군사당

사직공원 뒷편 황학정이 있는 언덕에 위치한 단군성전(檀君聖殿)이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신 대표적인 사당이다. 이 사당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해방 이후인 1968년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1990년대 쌍용그룹의 지원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은 단군 영정과 단군상을 모시고 있으며 단군성전 또는 백악전(百惡殿)이라 부른다. 역사적인 배경이 있거나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직공원 뒷편 인왕산길에서 볼 수 있는 단군성전 정문. 사직공원과 연결된 계단에서 출입하는 문 단군상과 영정을 모신 사당. 사당내부. 안내표지판

강화 충렬사(忠烈祠), 김상용을 비롯한 병자호란때 순절한 인물들을 모신 서원.

1641년(인조19)에 김상용을 비롯하여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강화 충렬사(忠烈祠)이다. 김상용(金尙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때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우의정 김상용을 비롯하여 순절한 6인을 모셨으나, 이후 당시 같이 순절한 인물들을 추가하여 총 28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사(顯忠祠)라 불렀으며, 효종으로부터 '충렬사(忠烈祠)'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았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원래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제사기능만 남아 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없고 사당, 외삼문, 수직방과 전사청 등만 남아 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

파주 적성향교, 적성현 관아에서 설치한 중등교육기관

파주 적성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시대 적성현 관아에서 설립한 중등교육기관이다. 향교는 삼국시대 군사요충지였던 칠중성 아래 위치하고 있다. 적성향교는 한국전쟁때 소실되었던 것을 1975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공간인 명륜당만 복원되었고,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는 복원되지 않았다. 파주시 적성면 일대는 삼국시대 고구려가 칠중현을 설치하였고, 신라에는 중성, 고려때부터 적성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으로 마전군, 서쪽으로 장단부와 파주, 남쪽으로 양주와 경계를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북쪽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남쪽 감악산을 비롯하여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다. 주변 지역이 넓지는 않지만..

서울 와룡묘, 남산 아래 자리잡은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

남산공원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와룡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선조대에 와룡묘를 짓게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남산 와룡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와룡묘는 구한말 고종의 후궁으로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 등을 설립하는 등 큰 엄귀비가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사당은 192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3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관우를 모신 사당인 동묘가 중국 전통 사당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와룡묘에는 단군사당, 삼성각 등 민속신앙 요소가 강한 사당들을 같이 모시고 있어 민속신앙과 결부되어 한국적인 사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와룡당이라 부르는 무당들이 치성을 드리는 장소와 비슷한 성격을..

고양 행주서원지와 충장사, 권율장군을 모신 서원과 사당

조선시대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 아래에 있는 조그만 서원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강학과 제사기능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서원에 모신 인물의 학풍을 따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학문과 사상을 논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곳 행주서원은 구한말인 1842년에 권율장군을을 모시는 서원 없어서 국왕인 헌종의 명으로 세워진 서원으로 제사기능을 주로 하고 있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제사기능을 1970년에 행주산성내 사당인 충장사로 옮겨져서 그 기능을 잃어버린 서원이다. 그래서 이름도 행주서원 옛터라는 의미로 행주서원지라고 부른다. 행주산성 아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행주나루터 인근에 세워진 이 행주서원 주변은 서울에서 가까운 대표적인 먹거리촌을 형성하고 있다. 행주서원지, 고양시 ..

상주향교, 상주목 관아에서 운영하던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

상주향교는 조선시대 지방통치조직 중 큰 규모였던 상주목 관아에서 운영하던 중등교육기관이다. 상주목 관아가 있던 상주 구도심 왕산공원에서 약 1.7km 떨어진 옛 상주읍성 남쪽에 위치한 남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상주 향교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조선초 세종8년(1426)에 처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대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고을 규모에 걸맞게 향교 중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 향교에서 남산중학교를 설립하여 향교가 중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 학교가 이전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향교는 조선후기에 서원에 밀려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선현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위상이 축소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전국대부분의 향교는 제사기능만..

김포 한재당, 초기 사림을 대표하는 이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

김포시 하성면 애기봉 전망대로 가는 길에 보이는 사당인 한재당이다. 조선중기 문신 이목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구한말인 헌종14년(1848)에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의 사당은 1974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은 1974년 중건하면서 콘크리이트로 지었기때문 전통 건축물로서 의미는 없지만 조선후기 양식이 남아 있는 사당이다. 원래는 일주문과 담장으로 둘려져 있었는데 지금은 담장과 내.외삼문으로 둘러져 있고 마당 한쪽에는 정자가 세워졌다. 이목은 조선 중기 성종~연산군대의 문신으로 조선시대 사림세력을 이끈 김굉필.정여창과 함께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25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때 처형되었으며, 갑자사화때..

김포 통진향교, 옛 통진현 중등교육기관

조선시대 한강하구 김포지역을 관장하던 통진현 관아가 있었던 월곶면소재지에는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인 통진향교가 남아 있다. 이 향교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려중기 인종대에 처음 세워졌다. 현(縣)단위 고을의 향교로서 그 규모는 크지 않으며 대성전, 동.서무, 명륜당, 동재와 문루인 풍화루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최근에 복구하였다고 한다. 경사진 지형에 앞쪽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 뒷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형태로 볼 때 명륜당과 동재의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조선후기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제사기능만 남은 전형적인 지방향교의 형태를 하고 있다. 통진현은 한강하..

진주 경절사, 진주하씨 시조 하공진을 모신 사당

진주성내 경상우병영 운주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는 경절사라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경절사는 고려시대 거란의 2침입때 큰 공을 세운 하공진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경절사는 원래 진주시 수곡면에 있었는데 199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서원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뒷편에 사당인 경절사가 있고, 앞쪽에 재실 성격의 건물 2동이 마주보고 있다. 하공진장군은 진주성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이곳에 있던 경남도청 건물 등이 허물어지고 사적지로 재정비되는 과정에 진주를 대표하는 성씨인 진주하씨문중에서 사당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공진(?~1011년)은 고려초 문신으로 진주하씨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고려초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였으며, 거란의 2차침입때 ..

진주 청계서원, 목화를 처음 재배한 정천익을 모신 서원

진주성내 옛 경상우병영 관아가 있었던 북장대 안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경남도청이 들어서면서 옛 관아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청계서원과 사당인 경절사가 들어서 있다. 청계서원은 고려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정신열과 우리나라에서 목화를 처음 재배한 인물인 정천익을 모신 서원이다. 청계서원은 조선후기 순조대에 진주 대평면 남강변에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으로 해방이후 진주성으로 옮겨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던 서원이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가문의 유력인물을 모시는 사당으로 변질되면서 많은 병폐가 생겨나던 시기에 세워진 전형적인 서원이라 할 수 있다. 청계서원은 가운데 강학공간인 강당이 있고, 양쪽에 사당인 경덕사와..

진주 창렬사와 비석들,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

진주성은 진주도심 남강변이 있는 성곽으로 둘레 1.7km의 내성과 4km의 외성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성곽이다. 경상도 남해안에서 섬진강을 따라서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교통로을 지키는 요새로 삼국시대 백제가 토성을 쌓은 이래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2차례에 걸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1차 진주성싸움은 김시민장군의 지휘 아래 3,800여명의 군사로 2만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이다. 2차 진주성싸움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주력부대가 호남평야를 장악하기 위해 5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벌인 싸움으로 비록 황진.최경회가 이끄는 관군과 김천일이 지휘하는 의병이 모두 순국한 끝에 패전한 전투이기는..

이천 설봉서원, 고려시대 거란과 담판으로 큰 외교적 업적을 남긴 서희를 모신 서원

설봉서원은 이천시 관고동 설봉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이다. 설봉서원은 고려초기 거란과의 외교에서 큰 공을 세운 문신이었던 서희를 비롯하여 이관의, 김안국, 최숙정을 모신 서원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인 명종대에 이천부사 정현이 지역유림의 건의에 따라 세운 서원으로 이천출신 인물 중 빼어난 업적을 보인 인물들을 모신 서원으로 최치원 등을 모신 경주 서악서원과 비슷한 성격의 초창기 서원이라 할 수 있다. 문중 중심 또는 조선시대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었기때문에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된 서원이다. 서원 건물은 사당, 강당, 동.서재로 구성된 전형적인 서원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이천시 도심에서 가까운 설봉공원내에 있어 공원을 찾거나 설봉..

여주 효종 영릉 재실 (보물 1532호)과 세종 영릉 재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재실과 비슷한 건물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이 들어서 왕릉을 세우고 유지하기 위한 규범인 산릉제도에 재실이 포함되면서 능역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에서도 조상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실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재실 건물은 외형상 일반 가옥과 비슷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참석하기 위한 공간으로 넓은 대청마루, 마루와 연결되어 같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온돌방,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등으로 이루어진다. 선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나 문묘에 딸린 강학공간 또한 재실의 기능을 확대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을 조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산릉제도에 따라 재실은 홍살문 바깥쪽 ..

태안향교, 태안군 관아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조선시대 공립중등교육기관

태안은 충남남도 서해안 태안반도 대부분이 포함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태안군이 설치되었다. 태안읍에 위치하는 해발284m의 백화산이 비교적 높은 산으로 대부분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안은 중국.한반도.일본을 경유하는 해상교역로가 존재했던 고대 이래로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시대 백제는 태안을 통해서 중국 남북조와 교류했으며, 그 흔적은 태안마애석불, 서산마애석불을 비롯하여 서산지역에 남아 있는 여러 고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태안군 관아에서 운영했던 공립중등교육기관이었던 태안향교는 태안군 관아가 있던 태안읍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는 보통 관아가 있는 읍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태안향교는 객사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태안초등학교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담양 몽한각,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건물

담양군 창평 삼지천 마을에서 동쪽으로 도로를 따라서 자동차로 10여분을 가면 대덕면소재지인 매산리마을이 있고, 마을 안쪽에는 구한말에 지어진 큰 재실건물인 몽한각을 볼 수 있다. 몽한각은 태종의 5대손으로 종종대에 이곳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인물인 이과를 위해 지어진 재실이다. 이과는 중종대에 창평에 정착했지만, 몽한각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세기초에 지어졌다. 건물은 앞면 5칸의 꽤 큰 규모의 건물이며, 재실 오른편에 앞면3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을 두고 있다. 솟을대문과 기와를 얹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몽한각은 마당이 꽤 넓은 것으로 볼 때 예전에 여러동의 건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담양 몽한각, 전남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이 건물은 이서 공의 재실이다. 이..

[성균관] 입구에 세워진 탕평비와 하마비, 문묘 출입문인 신삼문.동삼문,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이 앞쪽에, 명륜당을 중신으로 한 강학공간이 뒷편에 위치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성균관은 현재 옛 성균관을 계승한 성균관대학교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대학교문에서 캠퍼스로 들어가는 길이 옛 성균관을 출입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지방의 향교나 마찬가지로 성균관 입구에서 성균관의 권위를 보여주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영조가 당쟁타파를 위해 세웠다는 역사적인 비석인 탕평비가 비각속에 있다. 하마비를 지나면 제향공간인 대성전 출입문이 신삼문을 볼 수 있다. 신삼문은 대성전, 명륜당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이다. 신삼문은 신이 출입하는 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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