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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225

서울 양천고성지(사적 372), 삼국시대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하구를 지키던 산성

양천고성지(사적 372호)는 조선시대 양천현 관아가 있던 강서구 가양동에 궁산(해발 74m) 정상에 남아 있넌 산성터이다.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로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천고성이 있는 궁산은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되는 지금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요한 요새였다. 성은 궁산 정상에 길이 200m 정도의 성벽을 쌓은 테뫼식산산성으로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양천고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여러 문헌에 남아 있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 성에 머물렀다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궁산이 있는 양천현은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현령을 지냈던 곳으로 정선은 궁산에 올라 한강 경치를 감상하면서 여러 작품을 남..

서울 용마산 보루(사적455호), 고구려군이 아차산 일대에 쌓은 보루

아차산보루군은 삼국시대 한강유역 패권을 다투던 5~6세기에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풍납토성, 몽촌토성 지역을 압박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쌓았던 소규모 군사요새로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지이기도 한다. 현재까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 보루 등 17여개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10여개가 고구려군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용마산보루는 아차선 능선 북쪽의 4보루 북쪽 능선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일대 능선에 쌓은 보루를 말하며 용마산 정상을 비롯하여 7곳의 보루가 확인되었다. 보루는 주로 중랑천 일대 넓은 평야지대를 감시.장악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며 정상부 부근 능선에 3곳, 평지와 가까운 낮은 곳에 4곳의 보루가 확인되었다. 용마산보루에서는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

서울 아차산보루(사적455호), 고구려군이 쌓은 보루를 복원한 아차산4보루

한성백제 왕성이었던 풍납토성 북쪽 아차산 능선을 따라서 고구려군이 세웠던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4보루이다. 등산로를 따라 발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다른 보루와는 달리 4보루는 시범적으로 고구려군이 쌓았던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하고 있다. 아차산4보루는 둘레 249m로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석축을 쌓은 방어시설이다. 조선후기 강화도 일대에 쌓은 돈대와 비슷한 성격이지만, 여장이나 총구 등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성벽 위에 목책을 설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 안쪽 건물터에는 온돌, 배수로, 저수조 등이 있었으며, 투구.창.도끼같은 무기와 낫.쇠스랑같은 농기도, 말갖춤이 발굴되었다. 아마도 군사들이 주변에 둔전을 경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보루(사적455호)는 삼국시대 고구..

서울 아차산 보루(사적455호), 고구려가 한성백제를 장악하기 위해 쌓은 요새 (1,3,5보루)

서울 아차산 보루(사적455호)는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가 되는 아차산 일대에 있는 17여개의 보루를 말하며, 그중 일부를 제외하고은 고구려가 쌓았다고 한다. 아차산 보루군은 5세가 한강유역을 진출한 고구려가 한성백제의 왕성 위례성을 장악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아차산과 용마산, 수락산 능선을 중심을 중랑천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보루(堡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에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도록 쌓은 요새로 조선후기에 강화도 일대와 남한산성 등에서 볼 수 있는 돈대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보루를 쌓은 지점은 홍련봉이나 구의동 보루처럼 평지와 가까운 낮은 언덕에 쌓은 것도 있으며, 아차산이나 용마산 보루처럼 능선에 쌓은 것도 있다. 대부분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위례성을 ..

고양 행주산성, 흙으로 쌓은 삼국시대 토성

행주산성은 한강 하류 북쪽편 낮은 야산인 덕양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주변은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강과 고양시를 관통하고 있는 창릉천이 천연해자를 이루고 있다. 행주산성은 한강유역 쟁탈전이 극심했던 한성백제기에서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삼국통일이 될때까지는 한강하구 수운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였지만,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던 조선시대에는 크게 중요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석축을 별도 쌓지 않고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을 보완하고 있다. 넓은 평야을 통제하기 위해 천연요새같은 지형에 쌓은 전형적인 삼국시대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임진왜란때 이 곳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기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행주산성의 토성은 요즘 도시 근교의 작은 산에 많이 조성된..

강화 용두돈대(龍頭墩臺), 손돌목 해협을 지키는 돈대

용두돈대는 광성보에서 염하(강화해협) 해안의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손돌목돈대 아래에 볼 수 있다. 용두돈대는 고종8년(1871)에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광성포대를 설치할때 외곽초소 겸 포대로 세워졌다고 하다. 용두돈대는 김포와 강화사이에서 수심이 가장 빠르고 폭이 좁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편 광성포대, 덕진진의 남장포대, 김포쪽 덕포진 포대와 함께 강화해협(염하)을 지나다니는 선박을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손돌목은 강화해협 중에서도 그 폭이 가장 좁고 물살이 거센 곳으로 이 좁은 해협을 그냥 통과한 후 다시 밀물이 들어 올때까지는 퇴각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지형을 하고 있어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라 할 수 있다. 이 해협을 손돌목이라 하고 인조의 무능함을 ..

강화 광성포대, 신미.병인양요 이후 설치한 해안 포대

강화 광성보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 설치된 해안포대인 광성포대이다.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해안 방어 화력 증강의 필요성에 따라 고종때 설치된 군사시설로 돈대와는 달리 해안가 낮은 위치에 설치하여 함선을 공격하여 명중률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광성포대에는 9좌, 4좌, 3좌의 포자를 갖추고 총 16문의 화포를 배치할 수 있는 시설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18문의 화포를 운영하는 포병대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남쪽편 남장포대, 강화해협 반대편 김포의 덕포진 포대와 협공을 하며 선박을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정도 화력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침공하는 함대를 방어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1875년 일본의 운양호가 초지진을 침략했을때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운양호의 포격에 많은 피해를 ..

강화 손돌목 돈대, 광성보 언덕에 위치한 돈대

강화 해안을 지키는 많은 돈대를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 돈대이다. 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포를 설치할 수 있는 포좌 3개가 있으며, 여장은 벽돌로 쌓고 있다. 광성보가 관리하는 돈대 중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광성보 주변 포대와 돈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이며, 내부에는 무기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돈대 아래 해안가에는 용두돈대와 광성포대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광성포대, 남쪽에는 덕진진에 속한 남장포대와 덕진돈대가 위치하고 있다. 초지진부터 광성보까지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포대와 돈대가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손돌목은 염하(강화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곳으로 청나라의 침입때 인조가 이곳을 건너서 피신했고,..

강화 광성돈대, 광성보 성문과 강화해협을 지키는 해안방어시설

강화와 육지 사이를 흐르고 있는 염하를 감시하는 많은 돈대와 포대 중에서 광성보 문루인 안해루 옆에 위치하고 있는 광성돈대이대. 대부분의 돈대가 사각형 또는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서 광성돈대에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염하(강화해협)이 흐르는 강화해안에서 동쪽으로 약간 돌출된 곳에 설치된 광성돈대엔 북쪽과 동쪽으로 4곳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으며, 광성보를 출입하는 성문인 안해루를 엄호하면서 해안을 방어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1977년에 이곳을 정비하면서 돈대내부에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3문의 포(砲)가 설치/전시되어 있다. 광성돈대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강화 광성보, 신미양요의 현장

강화와 육지 사이를 흐르는 좁은 수로인 염하를 지키는 여러 요새들 중의 하나인 광성보이다. 광성보는 숙종대에 강화도 해안 전역에서 설치된 군사조직인 5진.7보 중 하나로 북쪽으로는 용진진, 남쪽으로는 덕진진과 초지진이 있다. 광성보는 강화해협(염하) 남쪽편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적인 요지로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이 가까운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방어시설로 많은 포대와 돈대가 배치되어 있다. 광성보는 광성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를 거느리는 지휘부 역할을 하는 곳으로 해안가를 따라 쌓은 성벽을 출입하는 문루인 안해루가 남아 있다. 구한말 병인.신미양요와 일본은 운요호사건이 이곳에서 벌어졌으며, 광성보는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이 곳을 지키던 조선병사 대부분이 순국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성..

[서울성곽] 인왕산 정상에서 창의문(자하문)으로 연결되는 성벽

한양도성 중 인왕산 성곽은 돈의문(서대문)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능선을 따라서 창의문(자하문)까지 약 3 km 정도 연결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최근에 복구되기는 했지만 성벽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구간 중 하나로 맑은 날 광화문 주변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에서 한양도성의 위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인왕산 정상에서 자하문까지 이어지는 성벽은 경사는 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아 놓고 있으며, 북쪽 방향으로 기차바위라 불리는 능선이 탕춘대성이 시작하는 홍지문까지 자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다. 인왕성 성벽은 청와대를 지키는 중요한 지역이기때문의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지금도 군부대들이 인왕산 성벽을 지키고 있다. 인왕산은 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과 함께 한..

[서울성곽] 낙산성곽, 한양도성 좌청룡에 해당되는 낙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

한양도성을 이루는 동.서.남.북 4곳의 봉우리 중 가장 낮은 해발 125m의 낙산은 도성 서쪽에 위치해 있어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낙산 북쪽에는 동소문에 해당하는 혜화문이 있고, 남쪽에는 동대문에 해당하는 흥인지문이 있다. 흥인지문은 한양의 물이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출구에 해당되며, 광나루를 비롯한 한양에서 한반도 동쪽 내륙지방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교통로와 연결되며, 혜화문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원산, 함흥을 비롯한 한반도 동북지역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교통로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낙산은 산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숲으로 우거지고, 크고 작은 바위와 약수터가 많아 안평대군의 별장인 석양루를 비롯하여 많은 정자들이 세워졌던 곳으로 한양의 5대 명소로 공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의 낙산..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산성 북쪽 한강에 내려다 보이는 능선에 설치된 방어시설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은 남한산성 아래 광주의 중심지역이었던 춘궁동, 이성산성 일대, 한강과 그 너머의 아차산성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지점에 설치된 방어시설이다. 남한산성 서문에서 북문을 연결하는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된 능선에 성벽과 여장, 포대를 설치한 옹성으로 그 둘레는 315m이며, 73개의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연주봉 옹성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던 것을 고증을 통해서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옹성은 원래 성문을 호위하기 위해 성문바깥쪽에 반원형으로 돌출된 성벽을 쌓은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남한산성 옹성은 성벽 바깥쪽 방어에 취약한 능선에 기존의 성벽에서 돌출된 형태로 쌓은 방어시설로 적이 거점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의 ..

안산 안산읍성 및 관아 건물터

경기도 서해안에 위치한 안산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장아구현이 설치된 이래 여러차례 그 명칭과 지위가 바뀌었는데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말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안산군으로 승격된 이래 그 지위가 유지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가 이지역에 반월공단이 세워지면서 도시화되어 1986년 안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인구 70만이 넘는 대도시로 인천과 함께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이다. 오늘날 안산은 서해안 갯벌을 간척하여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 도시로 시화호가 있는 해안 주변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안산군 읍치는 도심 동북쪽 군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수리산 서쪽편 자락에 위치한 수암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국..

남한산성 우익문(서문), 한양과 연결된 성문

남한산성 서문은 우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성문으로 남한산성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성문이다. 산성의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가 없고, 성문 앞은 경사면이 급해서 등산로로만 이용되고 있을뿐이지만, 한양에서 송파나루를 거쳐서 성문으로 통하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기때문에 이 곳에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문루와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로가 없는 까닭에 출입문의 크기는 일반적인 성문에 비해서 작아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지역 또한 이 서문 아래의 송파지역으로 산성내에서도 가장 전투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성문은 일반적인 산성의 성문과는 달리 한양에서 피신한 국왕 일행이 가장 빨리 산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산성이 처음 축조..

안산 별망성지, 조선시대 서해안을 방어를 맡은 초지영 수군이 주둔했던 곳

안산시 초지동 공단이 들어서 있는 해안가 작은 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별망성은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약 400여년간 수군 군영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별망성은 배가 정박하는 해안가 포구와 뒷동산을 연결하는 크지 않은 성곽으로 그 둘레는 원래 1km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초기 이곳에는 경기수영 관할 초지량영이 설치되었으며, 수군만호가 책임자였다고 한다. 이곳은 수원에서 발원한 동화천이라는 하천이 서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으로 안산이 공단으로 개발된 지금은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포구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구의 침입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말~조선초 남양만을 통해 수도인 한양으로 연결되는 길목을 지키고, 연안항로를 오가는 선박을 보호하기 위한 수군 군영이라 할 수 있다. 초지영은 병자호란..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서문(우익문)까지

남한산성의 중심이 되는 수어장대를 내려서 서울 송파지역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는 서문(우익문)까지의 성곽길이다. 수어장대에서 서문을 지난 북문까지의 성곽은 비슷한 고도를 따라서 능선길이 있으며, 경사가 별로 없는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과 같다. 옛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송파지역에 주둔했던 것처럼, 남한산성을 침입하는 가상의 적은 대부분 이쪽방면으로 올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성벽의 석축은 매우 견고하게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목적이 있었던 산성이지만 이는 주로 병자호란때 경우를 말한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는 한양과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한강을 건너야 했기때문에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국왕이 이 곳으로 피난할 목적으로 ..

남한산성, 수어장대 아래 서암문(제6암문)

남한산성 지휘부가 있었던 수어장대 아래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서암문이 있다. 수원화성 서장대나 동장대 부근에도 암문이 있었는데 이 곳 남한산성에서도 수어장대 아래에 지휘부가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인 암문을 두고 있다. 이 암문을 빠져 나가면 남한산성 아래쪽인 송파지역과 연결되며, 옛날에는 송파나루를 거쳐서 도성인 한양과 연결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문 북동쪽으로는 성벽을 돌출하여 적이 이 암문을 통과할 때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어며, 암문은 눈에 잘 띄지 않게 평거식으로 낮은 통로만 두고 있다. 지휘부가 있었던 수어장대 부근이라서 그런지 암문 주위 성벽은 주위보다 높고 튼튼하게 석축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암문(제6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

서울 탕춘대성, 구기동 암문에서 향로봉 아래까지

탕춘대성은 한양도성을 이루는 인왕산과 북한산 향로봉 아래까지를 연결한 성으로 숙종대와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북한산성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 뒷편에서 세검정을 거쳐 북한산성 대남문으로 연결되는 비상통로를 확보하고 군량미를 저장하면서 한양도성의 외성역할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용도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북악터널이 지나가는 보현봉과 북악산을 있는 동쪽편 능선에서 성을 쌓을 계획이었으나 숙종의 사망으로 완성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탕춘대성 안쪽 지형은 구기동 계곡을 중심으로 3면이 능선으로 둘러싸어 있고, 계곡에는 민가가 많지 않은 지역으로 조선시대 한양사람들이 휴식공간 역할을 했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구기동계곡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로 흐르는 홍제천이 유일한 통로이며 그 ..

남한산성 수어장대(서장대), 청량산 정상에 세운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남한산성에 쌓은 4개의 장대 중 서장대에 해당하는 수어장대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안에서 최고 높은 곳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성내부와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특히 도성인 한양과 한강, 그리고 한양과 남한산성까지의 길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삼전도비가 있는 송파구 일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라 인조가 직접 수어장대에 올라 전행을 지휘했다고 한다. 수어장대는 원래 1층 누각이었으나, 영조때 다시 위에 2층 누각을 지었으며, 바깥에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는데, 현재 '무망루'현편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별도의 보호각을 만들어서 전시해 놓고 있다. 인조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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