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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259

영월 법흥사,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보물 612호).

통일신라말 선종 구산선문 사자산파의 중심사찰인 흥녕사를 크게 발전시킨 징효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비(보물 612호)이다.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 양식을 하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발은 섬세하고 조각하고 있다. 거북등에 새겨진 껍질은 약간 형식적이다. 흥녕사는 5대 적멸보궁 중 한곳인 사자산 법흥사의 옛이름이다. 영월 사자산 법흥사 경내에 있는 징효대사탑비.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의 양식을 하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북받침돌. 옆에서 본 거북받침돌.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몸. 고려초 문신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최윤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 탑비의 제목이 적혀 있으며 양쪽에 용을 조각해 놓았다. 정면에서 본 탑비. 징효대사의 사리..

경조 남산 용장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

경주 남산 용장사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이다. 3층 대좌에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은 머리가 없어졌으며 손과 몸체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신체의 볼륨이 강조하지 않고 현실의 승려가 앉은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조각수법이나 신체의 표현 등이 우수하다. 사실적인 신체의 표현은 석굴암 감실의 불상이나 8세기 중엽 불상들에서 보여주는 특징이다. 불상이 남아 있는 이곳은 용장사에서 불전 역할을 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 용장사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옛 용장사에서 주불전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얼굴과 손 등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신체의 비례나 세부표현이 사실적이다. 불상이 올려져 있는 3단의 원형 대좌. 불상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주 ..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경주 남산 용장사 절터에 남아 있는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이다. 삼층석탑 아래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겨 놓았다. 얼굴은 원만하게 표현했으며 신체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활력있는 형태, 세련된 선의 흐름 등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8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위 옆 공간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이 남아 있다. 용장사 절터는 금오산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용장사 계곡 정상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조선초 세조때 생육신인 김시습이 이곳에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저술했다고 한다. 경주 남산 용장사 절터에 남아 있는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 바위에 돋을 새김한 불상으로 단순하지만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표현이 돋보인다. 마애불상..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경주 남산 탐방로 중 삼릉계곡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이다. 석굴암 본존불 조각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불상으로 얼굴은 원만하고 둥글게, 옷주름선은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꽃무늬와 안상을 조각해 놓았다. 얼굴부분이 파손이 심했는데 최근에 보수하여 복원해 놓고 있다. 광배 또한 불상에서 떨어져 있던 것을 원래의 위치에 붙여 놓았다. 불상이 있는 절터에는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약사여래좌상과 경주박물관에 있는 삼층석탑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큰 규모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 삼릉계곡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통일신라 석굴암 본존불의 조각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통일신라 석조불상이다. 연화대좌에 결가..

경주 남산 삼릉곡 마애관음보살상

경주 남산 삼릉계곡에서 2번째로 볼 수 있는 유물인 마애관음보살상이다. 바위에 불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관음보살을 표현하고 있다. 불상 뒷편 기둥모양 바위가 광배역할을 하고 있다. 얼굴과 몸통 윗부분은 입체감 있게 조각되었으나, 아랫부분은 윤곽이 거의 없으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인 8~9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남산 삼릉계곡 탐방로에서 2번째로 만날 수 있는 유물인 마애관음보살상. 불상은 기둥처럼 생긴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겨놓고 있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관음보살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쪽에서 본 모습.

경주 남산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

신라 불교의 성지 경주 남산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이다. 배리삼릉 뒷편 계곡을 따라서 오르는 탐방코스에서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불상이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어 원형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높이 1.6m의 상당히 큰 규모이며, 머리가 잘려있다. 불상의 신체나 복식 등 세부 표현이 섬세하며,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때 만들어진 불상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 배리삼릉 뒷편 계곡 탐방로에서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불상. 불상은 얼굴이 남아 있지 않지만, 신체나 복식의 세부표현이 섬세하며, 전체적인 조형미도 우수한 편이다. 옆쪽에서 본 모습 뒷편에서 본 모습.

경주 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186호)

경주 남산 용장사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186호)이다. 바위를 1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2층기단과 탑신을 올려놓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 정형화된 삼층석탑 형태를 하고 있는데, 주위 경치와 함께 아름다운 조형미를 만들고 있다. 절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용장사는 금오산 정상부 서쪽 용장사 계곡 정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찰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며, 절터에는 삼층석탑으로 비롯하여 석조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조선초 천재이자 생육신 중 한명인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저술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경주 용장사 계곡 정상부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186호). 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형미를 만들어 내고..

경주 남사리 삼층석탑(보물 907호)

경주 현곡면 남사리 마을 뒷편 절터에 있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2층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으며, 기단과 탑신 몸돌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은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을 하고 있지 않다. 전체적인 비례에서 보여주는 조형미나 세부 조각수법은 양호한 편이며,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절터에는 삼층석탑 외에 특별한 유물이나 건물터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 왕경이었던 경주 교외에 조성된 귀족들의 원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정형화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 기단부. 기둥모양을 새겨 놓은 것 외 특별한 장식이 없다. 3층으로 된 ..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보물 908호)

경주 용명리마을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908호)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기단과 탑신 몸돌에 기둥모양을 새겨놓은 것 외 특별한 장식이 없는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비례와 조각수법 등은 양호한 편이다. 절터에는 삼층석탑 외 특별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주변에는 민가들이 흩어져 있어 옛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다. 이곳에 용명사(龍明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사찰의 내력에 대한 기록도 없는 듯 하다.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보물 908호).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이다. 조가수법이나 전체적인 조형미는 양호한 편이다. 석탑 기단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겨놓고 ..

경주 단석산 마애불상군(국보 199호)

경주 단석산(斷石山, 해발 827m) 중턱에 있는 마애불상군(국보 199호)이다. 자연암석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지붕을 덮어 석굴사원을 만들고 있다. 석굴 내부 바위에는 10구의 부처와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미륵보살(여래입상)이 북쪽면에, 동쪽에는 관음보살, 남쪽에는 지장보살을 새겨 삼존불을 이루고 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으로 불상 조각수법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충남 서해안 지역 서산이나 태안의 삼존불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중국 낙양이나 산동지방에서 유행했던 석굴사원이 백제를 거쳐 신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석굴사원은 경주 골굴암, 군위 석굴암을 거쳐 토함산 석굴암에서 신라의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운다. 경주 단석산 마애불상군(국보 199호). 삼국시대 신라..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42호)

남원 용담사지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입상(보물 42호)이다. 큰 바위에 부처의 형상을 부조로 새겨놓은 높이 6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얼굴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심하게 마모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힘차고 박력있는 표정을 느낄 수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비롯하여 고려 초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성한 거대한 불상 중 하나이다. 조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마모되어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고 비례에서 주는 조형미도 양호한 편이다. 남원 용담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선국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출토된 유물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남원 용담사 옛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입상(보물 42호). 얼굴 형체는 알아볼 수..

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 (보물 294호)

경남 함양군 승안사 절터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 등의 모습을, 탑신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을 새겨놓은 통일신라말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머리장식으로 받침과 복발, 연꽃모양장식이 남아 있다. 기단과 탑신의 비례에서 보이는 조형미가 비해 떨어지는 편이며, 고려전기 특색을 보여주는 장식들이 여러곳 있다. 승안사(昇安寺)는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 북쪽에 승안산 기슭에 있던 사찰로 조선초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 다른 기록이 없다. 조선중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 기단과 탑신 1층 몸돌에 부조를 새겨 놓은 통일신라 말 삼층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기단부에는 부처, 보살, 비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보물 247호),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

대구 동화사 부속 암자인 비로암 대적광전 앞에 세워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다. 1층 몸돌에선 돌로 만들어진 사리그릇이 발견되었는데, 통일신라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기단부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조각해 놓고 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기동모양을 새겨놓았다. 석탑을 구성하고 있는 기단, 탑신, 머리장식의 비례가 우수하며, 특별한 장식은 없지만 단정하면서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장식적인 면은 없으나 전체적인 비례나 조형미가 우수한 편이다. 2층으로 된 기단부. 몸돌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고 있다. 3층..

골굴암 석조여래좌상 (보물 591호), 토함산 자락 바위에 새긴 불상

경주 토함산 동쪽 기림사 부근에는 작은 암자인 골굴암이 있다. 골굴암은 석굴암처럼 석굴사원 구현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암자이다. 멀리 양북면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언덕 아래 12개의 작은 자연굴에 불전을 마련하여 암자를 형성하고 있다. 골굴암은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겨놓을 정도로 당시에도 유명했던 곳이다. 골굴암 석조여래좌상(보물 591호)는 자연석을 조각해서 만든 마애불상이다. 연석의 석질이 고르지 않이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입체감이 돋보인다. 머리위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의 윤곽이 입체적이면서 뚜렷하다. 얼굴에 비해 신체는 평면적이며 넓게 표현되어 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을 이루며, 굴곡을 표현한 V자형 무늬가 ..

제비원 석불로 불렸던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115호)

안동시 이천동 옛 국도변에 위치한 제비원 석불로 불렸던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115호)이다. 고려초 지방 호족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성했던 거대한 석불 중 하나이다. 자연암석에 불상의 몸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머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미소가 흐르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수인(手印)을 하고 있어 아미타여래로 여겨진다. 이곳 이천동은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연미사(燕尾寺)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원(院)이 설치되어 제비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성주풀이’라는 민요에 가택신(家宅神)인 성주(城主)의 고향으로 설정된 곳이기도 하다. 제비원석불로 불렸던 ..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보물184호)

부여 사비성 남쪽 장암면 장하리에 있는 고려시대 삼층석탑(보물184호)이다. 백제 석탑을 대표하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든 석탑이다. 얇은 판석을 3층으로 쌓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1층 탑신 몸돌은 정림사지 석탑처럼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에 판석을 끼웠으며 2,3탑신의 몸돌은 하나의 돌에 기둥모양을 새겨 감실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탑신 몸돌에서는 사리구, 상아불상, 목제소탑 등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없고 조형미도 떨어지는 편이다. 통일신라가 멸망한 이후 옛 백제의 향수를 자극하고자 지역 호족이 정림사지 석탑을 모방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탑이 남아 있는 이곳은 금강나루터가 있었던 교..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217호)

부여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이 있는 성흥산 중턱 대조사(大鳥寺)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217호)이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초기 이 지역에 성행했던 미륵신앙을 잘 보여주는 유물로 높이 10m의 거대한 불상이다. 머리에는 이중 보개(寶蓋)를 얹은 관(冠)을 쓰고 있는 전형적인 미륵보살의 형상을 하고 있다. 몸통에 비해서 얼굴을 크고,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귀와 눈은 크고 코와 입은 작게 표현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으며 조각수법은 투박하다. 대조사(大鳥寺)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통 깊은 사찰이다. 13세기(고려 원종)에 크게 중건되면서 현재와 비슷한 사찰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삼층석탑이 같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조사(大鳥寺)라는..

부안 개암사 괘불(보물 1269호)

2015년 겨울 중앙박물관 2층 불교회화실에서 특별전시 중인 개암사 괘불(開巖寺 掛佛)이다. 내소사와 함께 서해안 변산반도를 대표하는 사찰인 개암사(開巖寺)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형괘불로 보물 12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13.17m에 이르는 대형 불화로 18세기 최의 화사(畵師)였던 의겸이 제작을 주도했고 12명의 승려가 참여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전국 사찰에는 괘불을 비롯하여 많은 불화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실제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문화재급에 해당하는 불화는 이곳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보살, 다보여래.아미타불, 관음.세지보살을 그린 영산괘불(靈山掛佛)이다. 괘불은 영산재(靈山齋).수륙재(水陸齋) 등의 큰 의식식을 베풀때 법당 바깥에 걸었던 불화..

천안 천흥사지 5층석탑(보물 354호), 고려전기 양식을 잘 보여주는 석탑

천안시 성거읍 천흥사 절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오층석탑(보물354호)이다. 지대석 위에 2층기단을 놓고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부는 1층은 낮게, 2층은 높게 만들었다. 윗층 기단은 각 면마다 1개씩 4개의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되어있으며 1층 기단은 높게,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높이가 줄어든다. 통일신라 말기 석탑이 작고 정형화된 형식인데 반해 웅장하면서 전체적인 비례에 있어 조형미가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 석탑을 연상시키고 있는 석탑이다. 천흥사는 천안 성거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던 사찰이었다. 천흥사종(국보280호)를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성종대..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 교통의 요지에 세워졌던 절터의 흔적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1번국도 도로변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비석인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이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서울과 호남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던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절터이다. 봉선홍경사는 고려 초인 1021년(현정12)에 세워진 사찰이다. 당시 이지역은 교통의 요지이지만 마을이 없고 주변에 습지가 많아 도적이 자주 출몰했기때문에 여행객의 안전을 위하여 현종이 절과 숙소인 원(院)을 세웠다고 한다. 봉선홍경사 갈비는 사찰이 세워진 뒤 5년후에 세워졌다. . 갈비(碣碑)는 보통 석비보다 규모가 작고 간략화된 것을 말하지만, 이 비석은 머릿돌, 몸돌, 거북받침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석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어룡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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