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서원 67

함양 청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

연산군 때 학자이자 문인인 김일손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함양 청계서원이다. 조선시대 세워진 서원은 아니고 1907년에 세워진 사당 성격의 서원이다. 강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이 낮은 곳에, 사당을 높은 곳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남계사원과 거의 비슷하게 지어졌는데 건축적 측면에서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김일손(1464~1498년)은 조선 성종~연산군대 활동한 학자이자 관리로 남계사원에 모셔진 정여창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사관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란 글을 사초(史草)에 넣어 무오사화 때 희생되었다. 한때 이곳에서 ‘청계정사’를 세후고 후학들을 양성했다고 하여 지역 유림들이 그를 기리는 유허비와 서원을 세웠다. 목천 도동서원과 청도 자계서원에 모셔졌다. 함양 남계서원 옆..

함양 남계서원(사적 499호)

조선중기 학자이자 관리였던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사적 499호)이다. 이 서원은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아래쪽에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서재를 두고 위쪽에 사당을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처음으로 구현한 서원으로 후대 세워진 서원들의 모범이 되었던 곳이다. 문루, 강당, 동.서재, 경판고(장판각), 내삼문, 사당, 전사청, 고직사 등 서원이 갖추어야 할 건물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서원건축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정여창(1450~1504년)은 성종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중기 사림세력을 이끌었던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성종 때 여러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퇴계 이황과 제자들을 모신 호계서원(虎溪書院)이다. 조선 선조 8년(1575)에 백련사 절터에 여강서원(麗江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다. 1605년에 대홍수 유실되어 다시 지었으며, 숙종대에 호계로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없어졌다가 강당만 새로 지었다. 강당은 앞면 3칸이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앞면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원래는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와룡면 도곡리에 있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향후 안동댐 부근으로 옮길 예정이라 한다. 안동시 임하면 임하댐 아래에 위치한 호계서원.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과 제자들인 류성룡, 김성일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강당만 복원되었다. 원래는 도산서원과 멀지 ..

강화 충렬사(忠烈祠), 김상용을 비롯한 병자호란때 순절한 인물들을 모신 서원.

1641년(인조19)에 김상용을 비롯하여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강화 충렬사(忠烈祠)이다. 김상용(金尙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때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우의정 김상용을 비롯하여 순절한 6인을 모셨으나, 이후 당시 같이 순절한 인물들을 추가하여 총 28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사(顯忠祠)라 불렀으며, 효종으로부터 '충렬사(忠烈祠)'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았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원래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제사기능만 남아 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없고 사당, 외삼문, 수직방과 전사청 등만 남아 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

고양 행주서원지와 충장사, 권율장군을 모신 서원과 사당

조선시대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 아래에 있는 조그만 서원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강학과 제사기능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서원에 모신 인물의 학풍을 따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학문과 사상을 논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곳 행주서원은 구한말인 1842년에 권율장군을을 모시는 서원 없어서 국왕인 헌종의 명으로 세워진 서원으로 제사기능을 주로 하고 있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제사기능을 1970년에 행주산성내 사당인 충장사로 옮겨져서 그 기능을 잃어버린 서원이다. 그래서 이름도 행주서원 옛터라는 의미로 행주서원지라고 부른다. 행주산성 아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행주나루터 인근에 세워진 이 행주서원 주변은 서울에서 가까운 대표적인 먹거리촌을 형성하고 있다. 행주서원지, 고양시 ..

[대구박물관] 대구.경북의 유교문화, 사림과 서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 중앙관료로 진출하지 않고 지역에서 영향를 갖고 있던 향리세력들은 점차로 중소지주로서 경제력을 축적하면서 학문적인 역량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성종대에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영남출신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중앙 훈구세력을 충돌하여 여러차례 사화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명종대에 이르러 사림은 조선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16세기 명종대에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들은 다양한 학파를 형성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논쟁을 생겨났다. 이런 농쟁의 결과로 서경덕.이황.조식.이이와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를 이끌 성리학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영남지역은 김종직을 비롯하여 사림들의 출신지로 다른 ..

지역박물관 2013.05.11

이천 설봉서원, 고려시대 거란과 담판으로 큰 외교적 업적을 남긴 서희를 모신 서원

설봉서원은 이천시 관고동 설봉산성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이다. 설봉서원은 고려초기 거란과의 외교에서 큰 공을 세운 문신이었던 서희를 비롯하여 이관의, 김안국, 최숙정을 모신 서원이다. 우리나라 서원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인 명종대에 이천부사 정현이 지역유림의 건의에 따라 세운 서원으로 이천출신 인물 중 빼어난 업적을 보인 인물들을 모신 서원으로 최치원 등을 모신 경주 서악서원과 비슷한 성격의 초창기 서원이라 할 수 있다. 문중 중심 또는 조선시대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었기때문에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된 서원이다. 서원 건물은 사당, 강당, 동.서재로 구성된 전형적인 서원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이천시 도심에서 가까운 설봉공원내에 있어 공원을 찾거나 설봉..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필암서원 문서(보물587호), 서원 운영 기록을 남겨 놓은 문서

정성 필암서원에는 조선후기 인조2년(1624)부터 구한말인 1900년까지 서원에서 작성했거나 발간했던 문서나 서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원래는 서원내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장판각 건물에서 보관했으나, 지금은 서원 앞에 유물전시관 형태의 꽤 건물에서 서원의 내력과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고 있다. 그 중 서원의 운영과정에서 작성한 각종 문서들은 조선후기 서원의 운영과 조직구성 들을 볼 수 있고,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 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서원에서 강의를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자 등 강의내력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 명단인 '문계안', ..

지역박물관 2013.03.07

장성 고산서원, 구한말 성리학자 기정진을 모신 서원

전남 장선군 진원면 면소재 가까운곳에 위치한 고산서원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기정진을 모신 서원이다. 기정진은 순창출신으로 구한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로 서경덕.이황.이이를 계승한 정통 성리학의 대가로 일컬어진다. 구한말 세도정치체제에서 잠깐 벼슬에 나간적이 있으나 일생의 대부분을 호남지방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보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송나라와 조선의 정통 유학을 연구했으며 '납량사의', '정자설', '이통설'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장성 고산서원은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모셔진 인물 또한 기정진과 그의 제자들이다. 서원의 건립은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들어서면서 서원의 무분별하게 설립되면서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사회문제가 되었기때문에 그 이후 서원..

장성 필암서원(사적242호), 호남 제일의 사액서원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소재한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을 모시기 위해서 1590년(선조23)에 세워진 서원이다.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과 함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영산강 중류지역 양반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서원이다. 서원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을 제사를 모시는 기능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갖고 있는데 필암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되었던 서원이다. 처음에는 장성읍 기산리에 서원이 세워졌으나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대에 다른곳에 옮겼으나 수해를 입어 1672년(현종13)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1659년(효종10)에 '필암'이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안동 화천서원, 하회마을 부용대 아래 겸암 류운룡을 모신 서원

안동 하회마을 건너편 낙동강 12경 중 하나인 부용대 아래에 위치한 화천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을 모신 서원이다. 비교적 늦은 시기은 조선후기 정조대에 세워진 서원으로 당시 서원은 교육기능보다는 제사 기능을 중시하여 강학공간을 크게 짓지 않는데 비해 화천서원은 조선 중기의 교육기능 중심 서원과 비슷한 규모로 지어졌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강당과 주사만 남아 있던 것으로 1996년에 복원하였다. 서원건물은 대부분 최근에 지은지은 것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낙동강 명승인 부용대와 인근에 있는 옥연정사와 더불어 하외마을 양반들이 후학양성을 위한 세웠던 입지조건과 배경에 의미를 갖는 서원이다. 겸암 류운룡은 서애 류성룡의 형으로 당대에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

파주 용주서원, 조선중기 문신 백인걸을 모신 서원

파주시 월령면 덕은리에 위치한 용주서원은 조선중기 문신인 백인걸을 모신 서원이다. 백인걸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조광조의 제자 중의 한명으로 기묘사화 때 큰 화를 입지 않았지만 명종대에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 을사사화 때 파직되고 이후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에 복직하여 선조때까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선조때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율곡 이이와 파주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였으며,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율곡과 함께 파주지역 서원을 대표하여 이지역 유학자인 성수침 형제를 모신 파산서원을 세웠으며, 파산서원에도 같이 모셔진 인물이다. 백인걸은 파산서원에도 모셔져 있지만, 파산서원이 세워진 직후인 1598년에 별도로 조감, 김행, 신제현, 백유함과..

파주 파산서원, 조선중기 학자 성수침과 성수종 형제 등을 모신 서원

임진강 남쪽편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 위치한 파산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 동생인 성수종과 백인걸을 모신 서원으로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이 서원은 파평면 일대를 지나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눌노천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신인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파주지역 유생들이 선조대에 세웠던 서원이다. 원래의 서원 건물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966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원은 제향공간인 사당과 강학공간인 강당, 동.서재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금은 사당만 복원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원에 모셔진 성수침..

경주 서악서원,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모신 서원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설총, 최치원을 모신 서원인 서악서원이다. 이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 명종때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모시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서원을 세울 때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라 이름을 짓고 직접 글을 써 현판을 달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고 한다. 인조대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악서원이 위치한 서악동은 선두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다. 주변에는 신라를 크게 중흥시..

경주 옥산서원(사적154호),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소재한 사적 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때 문신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전 서원이다. 옥산서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7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역인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세웠으며,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서원의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의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건물은 앞쪽에 강학공간, 뒷편에 제향공간을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서원을 출입하는 길이 있는 방향에 다른 서원에 비해서 넓은 고직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원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건물이 무변루가 있고, 그..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전형적인 경기지역 서원

수도권 지역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서원이 김포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중봉 조헌 선생을 모시고 있는 김포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우저서원이다. 우저서원은 낮은 야산 아래에 한강과 김포평야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고풍스러운 서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저서원은 수도권에 소재한 서원이라서 그런지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제외되었던 서원 중의 하나이고, 규모도 지방의 서원에 비해서는 크지 않다. 우저서원은 조헌선생을 모신 사당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동.서재로만 이루어져 있다. 조헌은 김포출신으로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한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명종대에 급제하여 전라도사, 통진현감, 보은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 물러난 뒤로는 충청도..

안성 덕봉서원, 숙종대 문신 오두인을 모신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서원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에 소재한 덕봉서원은 조선 숙종대에 정치적 사건인 기사환국으로 죽은 오두인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서원이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숙종대에 창건된 덕봉서원은 창건된 해에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건물은 강당인 정의당과 사당이 덕봉사우가 일렬로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정의당은 정조18년(1794)에 중수된 것이라고 하며, 나머지 건물들은 대체로 최근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경기도에 소재한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규모가 단촐한 편이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제사를 올리는 사당의 성격이 강한 조선후기에 세워진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

논산 돈암서원(사적383호), 김장생을 모시는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논산 돈암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김장생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1660년(현종1)에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돈암서원은 보물로 지정된 강당 건물인 응도당이 출입문 왼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입문 정면에 강학공간인 또다른 강당인 양성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양성당 왼쪽편에 장판각과 정의당이, 오른편에는 고직사가 배치되어 있고 뒷편에 사당인 유경사를 두고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사당에는 김장생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집,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 돈암서원은 인근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지대가 낮고 홍수때 물이 잠기는 경우가..

논산 노강서원(魯岡書院), 조선후기 당파 소론의 영수 윤증을 모신 서원

충남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 위치한 노강서원은 조선후기 당파 중 소론의 영수로 불리는 윤증이 모셔진 서원이다. 원래 노강서원은 인조대에 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당시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했던 윤황을 모시기 위해 1675년에 김수항의 발의로 세워졌으고 1682년(숙종8)에 '노강'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7년(숙종43)에 당쟁의 결과로 사액이 철거되었다가 1781년(정조5)에 회복되었다. 노강서원은 이후 윤문거를 비롯하여 윤선거, 윤증 부자가 추가로 배향되었고, 소론의 영수 윤증을 모신 서원으로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서원으로 발전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소론의 영수로 알려진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원래 송시열의 제자로 학문이 돋보였던..

논산 노강서원 강당 (보물 1746호),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건축물

논산 노강서원은 조선후기 유학자 윤황을 추무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1675년(숙종1)에 처음 세워진 후, 1682년 국왕으로부터 '노강'이라는 현판과 토지를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후에 그의 아들 윤문거와 윤선거.윤증 부자를 함께 모신 서원으로 논산 돈암서원과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큰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철폐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이다. 노강서원은 앞쪽에 강당과 동.서재로 이루어진 강학공간이, 뒷편에 사당인 제향공인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보물 1746호로 지정된 노강서원 강당은 앞면5칸, 옆면 3칸의 크 규모의 건축물로 돈암서원 응도당과 함께 기호지방을 대표하는 서원 건축물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대청마루와 온돌방사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