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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 필암서원에는 조선후기 인조2년(1624)부터 구한말인 1900년까지 서원에서 작성했거나 발간했던 문서나 서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원래는 서원내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장판각 건물에서 보관했으나, 지금은 서원 앞에 유물전시관 형태의 꽤 건물에서 서원의 내력과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고 있다. 그 중 서원의 운영과정에서 작성한 각종 문서들은 조선후기 서원의 운영과 조직구성 들을 볼 수 있고,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 58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서원에서 강의를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자 등 강의내력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 명단인 '문계안', 소속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서재유안서', 서원 소유 재산과 수입.지출 관련 사항을 기록한 '원성책', 서원 소속 노비와 자손을 기록한 '노비보'와 '노비안', 서원 방문객 명단을 적은 '봉심록' 등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개인의 학문적 업적 등을 담은 문집 등과는 달리 서원을 운영하면서 필요에 의해서 작성했던 실무문서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호남 제일의 서원 필암서원
필암서운은 김인후 선생의 학문적인 업적과 성리학적 선비정신을 추모하기 위한 후학들의 숭모활동으로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효종9년(1658) 전라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사액을 요청하고, 조정에서 현종 3년(1662) 봄에 필암서원으로 사액하였다. 필암서원은 후손들의 선조현양과 문인들의 학통계승, 그리고 향인들의 활동근거지로써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 서원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필암서원은 19세기 후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의연하게 남은 전남의 유일한 대현 서원이었다. <출처:필암서원>


상징필, 하서 김인후를 상징하는 붓


장성 필암서원 앞쪽에 별도로 지어진 유물전시관. 필암서원은 보물187호로 일괄지정된 전적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서원으로 대부분은 원래 장판각에 보관해 왔던 것을 별도의 전시관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필암서원문서 일괄, 보물 587호
인조 2년(1624)부터 1900년경까지의 자료들로써 총 14책 64매이다.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 '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 '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 '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 '부사하첩', 필암서원의 노비를 족보형식으로 적은 '노비보' 등이 있다. 이들 일관문서는 지방의 유교 교육 사정과 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 유림의 사회.경제 사정의 일면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출처: 필암서원>


장성 필암서원성책, 보물 187-11호, 숙종 6년(1680)에 작성된 필암서원 소유 노비와 전답 수입과 지출 관련 사항을 기록한 문서


필암서원서재유안서, 보물 587-6호, 현종대에 작성한 필암서원 소속 중인층의 명부


노비보(보물 587-1호), 18세기 경 필암서원 소속 노비와 그 자손들의 인적 사항을 족보형식으로 기록한 문서. 노비안(보물 587-12호), 헌종대에 노비 34인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서


필암서원원적, 보물587-7,8,9,10호, 서원에 적을 둔 유생들의 명부, 필암서원 소유 자산 관계 기록


원장선생안, 보물 587-2호, 송준길, 유척기 등 필암서원 역대 원장 9명의 자, 생년, 본관, 관함, 호, 시호를 기록한 문서


봉심록, 보물 587-13호, 인조2년(1624)부터 숙종27년(1701)까지 필암서원을 찾은 방문객들의 명단이다. 봉심록 앞부분에서는 관찰사, 현감 등의 지방관이 나오나 뒷부분은 유학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진사, 생원, 신급제, 유학 등 약 1520여명의 인명과 본관 및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필암서원 소장 그림과 글씨

서원의 기능과 역할
제례와 교육이 서원의 대표적인 기능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은 원임과 유생들이 모여 향촌과 나라에 관한 일들을 논의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장소를 제공하였으며, 도서를 간행하고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서원제례의 거행
제관은 헌관과 집사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헌관은 서원에 모셔진 선현들에게 잔을 올리는 제관이며, 집사는 헌관을 도와 제례를 원만하게 진행토록 보조하는 하급제관이었다. 제관이 정해지면 서원 전사청에 보관하고 있는 제기와 제수를 마련하였다. 제수는 대부분 관아에서 지급하였다. 헌관, 집사, 원임, 유생들이 참석하여 제례를 마친 뒤에는 서원에 모여 앉아 음복을 하고, 제수를 나누어 가졌다. 이를 복주라고 한다. 이어 유희를 열어 서원과 고을의 여러가지 일들을 논의 하였다. <출처:필암서원>


사당에서 하서선생에게 제를 올리는 상황을 재현한 모습

교육,
서원 교육은 과거준비, 의리탐구, 백성교화에 목적을 두어 성리학의 정착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0 거접, 유생들을 일정기간 모아 독서와 제술 등을 시키는 것으로 거재라고도 한다.
0 강회, 매달 삭망에 원임과 유생들이 묘우에 나아가 행촉을 밝히는 삭망분향제 거행 후에 유생들이 모여서 경전을 강독하는 것이다. 이를 0 통독이라 한다.
0 순제, 유생들에게 문제를 내주면 집에서 시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이다. 시와 부를, 그리고 사서오경의 의문풀기와 뜻풀이에 관한 문제가 주어졌다.
0 백일장, 공공장소인 시험장에서 시부의 실력을 겨루는 것이다. 수령과 원임들이 평가를 하여 성적우수자에게 상을 주었다.
<출처: 필암서원>


청절당의 글소리, 청절당에서 유생들이 소학과 대학을 교육받는 모습을 재현


동배서재의 안식. 유생들이 동재와 서재에서 기거하여 생활하는 모습을 재현

서원의 개요,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례와 학생에 대한 교육을 수행해 온 교육기관이었다. 서원이 제도로 정해진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다. 특히 주자가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세운 백록동서원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효시이다. 서원은 제례와 교육이라는 두가지 기능 외에도 원임과 유생들이 모여 향촌과 나라에 관한 일들을 논의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장소였으며, 도서를 간행하고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회에서 서원은 정치사적, 사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원의 성립,
고려말 이후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선비들은 지방에 서재라는 학교를 세우고 자제들을 가르쳤다. 16세기에 사화가 빈번히 일어나자 선비들은 유명한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과 서재의 교육기능을 합하여 서원이라는 새로운 교육시설을 만들어냈다. 서원 건립은 지방 선비들이 앞장섰으나, 기능이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적.노비 등을 내렸으니, 이를 사액서원이라 한다. 1550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서적.노비를 부여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서원의 발달과정,
서원의 발달과정은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현종에 이르는 발전기, 숙종~영조 초까지의 남설기, 영조 17년 이후의 쇠퇴기 및 철폐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서원은 16세기 중엽에 등장하여 양반 사족들의 교육기관이자 향촌기구로 존속해 왔다. 17세기 이후에는 서원이 당쟁의 배후기지로도 활용되어서 당색과 양반들의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곳곳에 남설되었고 사액이 남발되어 여러가지 폐단이 일어나자, 영조 17년에는 사설된 서원 일부가 철훼되었고, 그 뒤 대원군에 의하여 만동묘의 철폐, 미사액서원의 철폐, 사액서원의 철폐라는 단계를 거쳐 47개만 남기고 모두 정리되었다.

이름난 서원,
조선시대에 건립된 서원에는 사우도 포함되는데 그 수가 1천 개소에 이른다. 이는 정부에 의해 파악된 것에 불과하며 향촌에서 건립되어 알려지지 않은 서원도 많았다. 한 고을에 수십개의 서원이 건립 되었는가 하면 한 사람이 여러 개소의 서원 배향되고 있었다. 서원의 남설은 서원의 격을 떨어 뜨리고 여러가지로 민폐를 끼쳤다. 정부도 서원의 첩설을 금지하고 문제가 있는 서원은 철폐시키기도 하였으나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는데, 흥선 대원군이 과감히 서원을 정리하여 전국적으로 47개의 사액서원만 남겨 놓았다.


필암서원 모형.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진 서원으로 문루, 강강,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양쪽으로 서원 관리인의 숙소인 고직사, 목판과 전적을 보관하는 장판각 등이 있다.

서원의 교육내용
서원의 교육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에 충실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황이 이산원규에서 제시한 교재의 별위와 학습의 순서가 정형이 되었다. 사서오경으로는 본원을 삼고, '소학', '가례'를 문호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이는 서원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라고 하겠다. 위의 사서오경 외에도, 여러가지 경사사집 속에서 서원의 성격에 따라 선별하여 교육하였다. 그리고 성리학.도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사상학적인 유학도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키는 서원도 있었다. 그러나 불학.서학 등 이른바 이단에 관계되는 서책이나, 음사, 도참,미신에 관련된 내용은 철저히 금하였다. <출처:필암서원>


필암서원 주요 교육 내용

서원의 교육방법
원생에 대한 교육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 학습의 조화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규에서는 수학규칙.거재규칙.교수실천요강.독서법 등 유자로서 지켜야 할 준칙이 실려 있다. 독서는 다독과 기송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쓸 것과 지와 행이 반드시 일치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각자에게 선악양적과 같은 일종의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경우에 따라서 출재(기숙사에서 쫓아냄)를 명하기도 하였다. 서원의 전통적인 교수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이 있다. 강은 대개 순강.망강.월강 등으로 나뉘다. 또한 그 방법에 따라 암송낭독인 배강과 임문낭독인 면강으로 분류된다. 낭독 뒤의 질의응답은 단순한 암속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출처:필암서원>

서원의 교육평가
필암서원은 도기제도를 도입하여 유생의 출석여부를 확인하고, 학령의 준칙에 따라 고과평정과 독서지침을 제시하였다. 강의평가는 대통.통.약통.조통.불의 5단계, 또는 통.약.조.불의 4단계 평가척도로 하였다. 이때 대통은 구두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책의 취지를 두루 알 수 있는 가장 높은 학습수준을 갖춘 자에게 부여하였다. 가장 낮은 단계인 불은 낙제를 의미하였다. 이상과 같은 강학할동 이외에 서원의 제향기동도 그 교육적 의미가 높다. 서원에서 행하는 춘추향사는 엄격한 의례절차를 통하여 원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인 선현을 본받게 하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춘추향사에 참례할 자격은 까다로운 인선절차를 거쳐 그 사회교육적 기능이 컸다. 향사시의 출입.승강 등 절차와 제반 제례의식 등 유자들이 평소 지녀야 할 기본적인 법도와 몸가짐을 익히게 하였다. <출처:필암서원>


대학, 유교 경전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정통으로 나타내는 사서 중 중요한 경서


소학, 송나라때 주자가 쓴 소년들에게 유학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해 교열.가필하여 만든 책으로 조선시대 교육기관의 필수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