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는 최근까지도 알려진 것의 거의 없다고 1960년대 미국인 대학원생이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한반도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물인 뗀석기인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세계 고고학계의 통념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는 연천 전곡리유적지를 비롯하여 파주 금파리, 제천 수양개 등 한강을 비롯하여 전국의 큰 강을 중심으로 유적지들이 발견되었다. 낙동강 중.상류지역에 해당되는 경북지역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주먹도끼가 안동 마애리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대구 월성동, 상주 신상리 등 낙동강 주변에서 구석기 유적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구석기 유적기가 많이 발견되는 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구.경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구석기시대는 인간이 돌을 깨트려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기 시작하던 문화 단계이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수십만년 전으로, 그들은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면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았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상주 신상리유적, 대구 월성동유적이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이다. 2006년 대구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어 인간의 거주는 2만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상주 신상리유적은 전기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움집 또는 바위그늘, 조개무지 등이 있다. 움집은 지하에 일정한 넓이의 구덩이를 파고 지붕을 덮었다. 바닥은 맨바닥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바닥으로 가운데에는 화덕을 만들었다. 조개무지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인 곳이다. 여기에는 각종 토기, 석기, 골각기 등 많은 유물이 섞여있기에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대구박물관>
몸돌, 여러면석기, 대구 월성동 출토유물(구석기시대), 상주 신상리 출토 유물(구석기시대), 몸돌(상주 신상리, 구석기시대)
주먹도끼(안동 마애리, 구석기시대), 석기를 손에 쥐고 사용하기 때문에 주먹도끼라고 부른다. 석재로부터 큰 박편을 떼 내거나 적당한 크기의 석재를 양쪽에서 큰 박편을 떼 내거나 적당한 크기의 석재를 양쪽에서 때려 날을 만들어낸다. 사냥.도살행위.나무가공.가죽가공.뼈가공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용된 주먹도끼는 우리나라에서 연천.파주.양평.단양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경북지역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인 안동 마애리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출처:대구박물관>
대구.경북지역 신석기시대
한반도에서 인류가 정착한 것은 구석시대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유적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발견되고 있으며, 그 유물 또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만들어 곡식을 저장.운반하고 간석기를 이용해서 사냥,농경을 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신석기인들은 농경보다는 강가 또는 해안 습지 등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이며, 식량은 산에서 채집한 도토리를 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지로는 서울 암사동,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을 들 수 있다. 경북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유물들은 대구를 비롯하여 낙동강변이나 동해안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도구의 발달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떼거나 갈아서 석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이다. 간석기로는 도끼, 자귀, 반달돌탈, 별도끼 등이 발견된다. 집터에서 출토되는 갈돌과 갈판은 도토리 등 자연 열매를 가공하는 데 쓰였던 것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로 낚시바늘과 작살, 그물추 등이 있다. 구석기인들은 돌과 뼈를 쪼갤 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날을 이용하였다. 반면 신석기인들은 돌과 뼈를 원하는 형태에 맞춰 잘라내고, 갈고 구멍을 뚫어서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었다. 점차 낚시, 화살촉 등 석기뿐만 아니라 뼈 연모와 꾸미개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토기는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표면에 진흙 띠를 덧붙여 무늬를 만든 것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뾰족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한반도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긁개(상주 신상리, 구석기시대),
돌작살(울산 황성동, 신석기시대), 결합식낚시바늘(울산 황성동, 신석기시대), 그물추(대구 서변동, 신석기시대), 골제작살(울산 황성동, 신석기시대)
돌도끼, 대구.경북지역, 신석기시대
선사시대의 질그릇들
토기는 인간이 흙과 불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토기를 발명하기 이전에는 나무와 갈대, 가죽 등으로 그릇을 만들어 식량을 보관하거나 운반하였다. 한반도 최초의 토기는 기원전 약 6,000년 무렵의 덧무늬토기로 겉면에 진흙 띠를 붙여 무늬를 만든 것이다.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 4,500년 무렵부터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형식의 토기로, 바닥이 뾰족한 모양이다. 초기의 빗살무늬토기는 겉면을 아가리, 몸통, 바닥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하는 규칙성을 보인다. 기원전 3,500년 무렵에는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무늬는 점차 간략해지고 면적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새로운 형식의 민무늬토기로 대체되었다. 토기 겉면에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는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은 거친 진흙으로 빚어 한뎃가마에서 구웠으며 바닥이 납작하고 적갈색을 띤다. <출처:대구박물관>
신석시시대 토기
빗살무늬토기는 대체로 기원전 4,000~1,000년 사이에 주로 산림이 우거진 강과 하천 주변에서 수렵과 어업을 주된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빗살무늬토기는 '흙테'를 하나씩 만들고 차례로 쌓아 올리면서 만들었다. 대부분 곧은 입술에 그릇 밑이 도토리나 달걀처럼 뾰족하거나 둥근 모양이다. 따라서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살았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모래 위체 이 그릇을 안전하게 놓고 사용하였다. 토기의 겉면에 나무 뼈연장 또는 그것으로 만든 여러 가닥이 난 빗살모양의 무늬 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 면에 짤막한 줄을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긴 것을 빗살무늬라고 한다. <출처:대구박물관>
빗살무늬토기(대구 서변동, 신석기시대), 골아가리토기(대구 서변동,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토기
민무늬토기는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토기를 일컫는다.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은 진흙으로 빚어 한뎃가마에서 구운 납작바닥 토기로 대개 붉은색을 띤다. 형태는 바리, 대접, 항아리, 독, 굽다리접시 등으로 신석기시대에 비해 종류가 다양해지며 음식조리용, 식기, 용기 등으로 용도가 나누어진다. 또 구멍무늬토기, 팽이형토기, 송국리형토기, 화분형토기, 덧띠토기 등이 시기와 지역별로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전개되었다. 이밖에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 붉은간토기, 가지무늬토기, 검은간토기 등 의례용 토기도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항아리(대구 각산동, 청동기시대), 구멍무늬토기(안동 저전리, 청동기시대), 깊은 바리(대구 서번동,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 신석기시대에 유행하던 빗살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에 점차 소멸하고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의 무늬없는 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민무늬토기는 대체로 기벽이 두터우며, 노천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졌기 때문에 적갈색을 띠고 있다. 대부분 납작바닥이며 대형은 보관용, 작은 것은 조리용이다. <출처:대구박물관>
민무늬바리(대구 상동.서변동.월성동, 청동기시대),
잎사귀가 찍힌 바닥(대구 대천동,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 청동기시대 정선된 흙을 테쌓기 한 얇은 기벽에 붉은 색 안료를 칠하고 윤이 나게 마연하여 홍도.단도마연토기라고도 부른다.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어 제의용.부장용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서북지역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특히 낙동강유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붉은간토기(대구 대천동.상동.상인동, 청동기시대),
농사짓는 선사인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농사를 짓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이전보다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석기 가운데 농사도구로 사용된 것이 있는데, 거칠게 떼어낸 돌로 괭이를 만들어 땅을 파서 농사를 지었다. 농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돌보습으로 땅을 깊이 파서 일구었고, 반달돌칼로는 곡식을 거둘 때 이삭을 따 내었다. 또한, 열매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데 갈돌과 갈판을 이용하였다.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된 식량자원은 한꺼번에 소비하지 않고 장기간 저장과 보관으 ㄹ하였다. 인구의 증가, 대규모 마을, 생산물의 저장, 전쟁 등은 인간이 식량을 생산하면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낮은 구릉지대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주변의 구릉이나 평탄한 곳에 논밭을 일구어 벼, 조, 수수, 콩, 보리 등 농사를 지었다. <출처:대구박물관>
반달모양돌탈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데 사용한 수확용 도구이다. 석기의 모양은 이름 그대로 반달모양인 것이 많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네모꼴, 충청.전라도 해안지역을 포함한 남부지방에서는 세모꼴도 만들어졌다. 돌칼의 형태는 다르더라도 모두 손걸이 끈을 끼우기 위한 구멍이 1~3개 뚫려 있다. 반달돌칼은 신석기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청동기시대에는 벼농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출처:대구박물관>
반달돌칼(대구 대천동.매천동.상동.상인동.서변동.월성동, 청동기시대)
방추차(대구 대천동.서변동.월성동, 청동기시대), 그물추(대구 매천동.서변동, 청동기시대), 발화석(대구 서변동, 청동기시대)
돌도끼(대구 매천동.서변동, 울진 후포리, 청동기시대), 별모양도끼(대구 서변동, 청동기시대)
여러 가지 공구들, 대구 대천동.매천동.서변동, 청동기시대
갈돌.갈판, 대구 매천동, 청동기시대,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도토리 등 나무열매를 가루로 만드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갈돌은 소형 자갈돌이나, 20~40cm 몽둥이 모양의 대형을 사용한다. 밑에 놓인 갈판은 가운데가 장기간 사용으로 인해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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