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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때 국가기관인 성전(成典)이 설치되었던 사찰

성전(成典)은 통일신라 때 왕실을 후원을 받았던 사찰에 설치된 관청이다. 칠처가람이었던 사천왕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와 봉은사, 봉덕사, 봉성사, 감은사, 영창궁이 성전이 설치되었다. 에는 각 사찰에 성전이 설치되었던 내력과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영창궁성전 ( 677년 (음) ) 영창궁성전(永昌宮成典)은 문무왕(文武王) 17년(677년)에 두었다. (삼국사기 권 제38 잡지 제7 직관 영창궁 성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사천왕사(四天王寺)는 낭산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은 경주에서 울산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

통일신라 오층석탑, 신라 석탑의 특징이 반영된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백제가 중국 남조의 목탑 양식을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쌓은 형태이다. 6세기 말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쌓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이 가장 오래된 오층석탑이다. 탑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았는데 목탑과 비슷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초기에는 석재를 목재처럼 가공하면서 세부적으로 구성을 간략하게 하면서 독창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 통일신라에서는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이 가장 오래된 오층석탑이다. 이후 백제 석탑의 특징과 신라 모전석탑의 특징을 갖이 보여주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양식이 완성되면서 그 특징을 적용한 오층석탑이 조성되었다. 통일신라에서는 삼층석탑이 주를 이루지만 신라 석탑의 특징을 반영한 오층석탑도 같이 조성되었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통일신라 삼층석탑,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전형

삼국시대 백제는 목탑을 모방하여 석재를 가공하여 조립하는 짜맞추는 형식을 발전시켰으며, 신라는 중국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을 발전시켰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두가지 양식을 절충하고 종합하면서 새로운 석탑 양식을 만들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전 석탑에 외형을 간략화하면서 석탑의 구성 자재가 수가 크게 줄어들고 전체적인 비례나 조형미가 뛰어나다. 통일신라 삼층석탑은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그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 삼층석탑은 대부분 불국사 삼층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후대의 삼층석탑은 외형적인 크기가 점차 작아지면서 정형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후대에는 기단..

백제계 석탑, 중국 목탑을 모방해서 쌓은 석탑

백제계 석탑이란 백제시대 만들어진 탑과 백제의 영역인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나타나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탑을 말한다. 중국 목탑 양식을 바탕으로 돌을 목재형식으로 가공하여 석탑을 쌓았다. 백제계석탑은 목탑을 화강암으로 번한한 데서 시작한다. 석재의 각을 죽이고 직선에 가까운 곡선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백제계탑은 기단부가 약화되어 있다. 비로 지상에서 솟아난 듯한 느낌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의 날씬함까지 더해져 탑에 상승감을 준다. 목탑을 모방해서 만든 백제계 석탑은 한국 석탑의 전형이 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석탑은 목탑을 거의 원형에 가깝게 구현한 미륵사지석탑(국보)과 한국적인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가 있다..

목탑(木塔), 중국 누각의 형태로 지어진 탑

목탑(木塔)은 인도의 복팔형 탑파(塔婆)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 전통의 누각(樓閣) 형태로 변형되어 발달하였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에는 사찰을 세울 때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국의 가림배치가 받아들여 삼국은 각각 고유의 가람배치를 형성하게 되었다.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목탑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다 소실되고 현재 그 터만 남아 있다. 백제의 목탑지는 부여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신라의 목탑지는 경주 황룡사지, 고구려의 목탑지로는 평양 청암리사지에 남아 있는 목탑지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목탑들은 화재나 전란 등으로 소실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조선후기(17세기초)에 건축된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이 한국 목탑을 대표하는 거의 유일한 유물이다. 중..

모전석탑(模塼石塔), 전탑을 모방하여 쌓은 석탑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삼국시대에 중국 산동지방의 영향을 받아 전탑을 모방하여 구운벽돌 대신 돌을 벽돌모양을 다듬어 쌓은 탑았다. 목탑의 모방하여 쌓은 쌓은 백제의 석탑과 대비되는 부분은 신라를 중심으로 유행한 석탑 형태이다. 전탑과 함께 한강유역을 통해 신라의 수도 경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 주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통일신라에는 백제 석탑을 영향을 받아 석재를 목재처럼 가공하여 쌓는 석탑의 양식이 섞여 있는 모전석탑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후에도 벽돌모양으로 쌓은 초기 형태의 모전석탑은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기존 모전석탑의 해체, 수리 등을 통해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 초기 모전석탑은 돌을 벽..

전탑(塼塔), 벽돌로 지은 탑

탑파(塔婆, Pagoda)는 스투파(Stupa)에 어원을 둔 단어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무덤 건축물을 말하며 불탑(佛塔) 또는 탑이라 부른다. 인도에서는 봉분 형태의 구조물에 상륜부를 얹은 형태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목조건축물인 무덤 앞 사당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전탑(塼塔)은 벽돌로 지은 탑을 말하며 목탑을 모방했는데 재료의 특성과 축조방식에 따라 지붕이 간략화되는 등 외형에서 목탑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산동지방을 통해 전래되면서 신라의 영역이었던 남한강 유역과 경북 북부지방에서 전탑이 주로 조성되었으며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도 많이 세워졌다. 전탑의 재료의 특성으로 원형이 크게 변형되거나 훼손되어 현재 한반도는 5기의 전탑만이 남아 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불교 석굴사원(石窟寺院)

석굴사원(石窟寺院)은 바위 굴을 뚫고 공간을 조성한 사원으로 다양한 종교에서 석굴사원을 조성했다. 불교에서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원래는 더운 지방에서 습기와 벌레 등을 피해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아파트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다. 주로 큰 마을 부근이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다. 이후 불상을 모시고 벽면에 부조나 벽화를 장식하면서 장엄한 분위기가 강조되는 신성한 공간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석굴사원은 용문석굴, 운강석굴 등이 조성되었던 남북조시대 중국을 통해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 불교사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 용현리 마애석불과 태안 마애석불이 초기 백제의 석굴사원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석굴..

백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창건된 부여와 익산의 사찰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때(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백제로 건너와 처음 전래되었다. 이후 백제 불교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많지 않지만 일반인들 사이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성왕 때(526년) 겸익(謙益)이 인도로 방문 후 블경을 가지고 돌아와 범눈으로 된 불경을 번역하였다. 또한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경과 불교문화와 관련된 인물들을 청했으며 일본에도 불교를 전하여 한국과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왕대 이후 불교는 국가 중심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적인 성격의 계율종(戒律宗)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제는 왕실의 후원으로 수도 부여에 많은 사찰이 세웠으며, 무왕 때에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목적으로 큰 사찰들이 세워졌다. 백제 사찰은..

신라 경주 칠처가람(七處伽藍), 7곳 신성한 숲에 세워진 사찰

칠처가람(七處伽藍)은 삼국시대 경주에 신라 불국토설의 일환으로 신성시 여기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사찰들을 말한다. 에 따르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我道)는 경주에 전불시대(석가모니를 포함한 과거칠불) 7곳의 절터가 있으니 불교를 전파하라는 당부를 받는다. 그곳에 세워진 칠처가람으로는 경주 동쪽 분황사(芬皇寺)와 황룡사(皇龍寺), 남쪽 낭산 사천왕사(四天王寺), 서쪽 오릉 주변 영흥사(永興寺), 영묘사(靈廟寺), 담엄사(曇嚴寺), 흥륜사(興輪寺)가 있다. 칠처가람 중 천경림 흥륜사, 삼천기 영흥사, 사천 끝 영묘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출토유물이나 문헌,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으며, 경주공고 주변과 흥륜사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처가람은 법흥왕의 불교공인 후 귀족층의..

고려 불교 천태종(天台宗)

천태종(天台宗)은 을 소의경전하는 불교 종파로 남북조시대 처음 연구되었으며 수나라 때(594년) 지의(智顗, 538~597)이 처음 열었다. 수.당시기 생겨난 불교 종단 중 화엄종과 함께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교학을 대표하는 종단이다. 일본에서는 사이초(最澄, 767~ 822년)에 의해 802년 전래되어 일본 불교를 이끌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은 시기인 고려 숙종 때(1097년)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 ~ 1101년)이 중국에서 천태학을 배운 후 귀국하여 해동 천태종을 열었다. 해동 천태종은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불교였던 중국과는 달리 실천적 면을 강조한 선종에 가까운 불교로 발전하였다. 고려왕실을 후원을 받아 크게 번성하였으나 조선이 건국하면서 억압을 받아 선종으로 폐합되었다. 은 천태..

통일신라 불교 해동 진언종(眞言宗)

밀교(密敎)는 비밀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문자나 언어로 표현된 현교(顯敎)를 초월한 최고의 가르침을 말한다. 인도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승불교로 다라니(陀羅尼)라 부르는 주문을 중시하며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과 이 주요 경전이다. 중국에서는 밀종(密宗), 한국과 일본에서는 진언종(眞言宗)이라고 하며 티벳불교도 밀교에 속한다. 한국의 밀교는 삼국시대 신라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래되었으며 밀본(密本)도 선덕여왕의 질병을 치유하는 등 밀교 전파에 공헌하였다. 이후 혜통(惠通)은 당나라에서 선무외(善無畏, 637-735년)엑 정통 밀교를 배우고 돌아와 해동진언종을 열었다. 당나라에서 활동하며 인도를 다녀와 을 남긴 혜초(蕙草)도 대표적인 밀교 승려이..

통일신라 불교 법성종(法性宗)

법성종(法性宗)은 일체 만유(萬有)는 같은 법성을 가졌고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불교 종파로 삼론종, 화엄종, 진언종, 천태조 등 대부분 불교 종파의 교리를 포괄하고 있다. 삼국시대 원효(元曉)가 한국적인 불교로 시작하였으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불교 종파를 형성했다. 경주 분황사(芬皇寺)를 근본도량으로 하고 분황종이고도 하며 해동종, 중도종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개성 왕륜사(王輪寺)를 본사를 했으며 조선초까지 존립하였으나 불교 종단으로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다. 원효(617 ~ 586년)은 의상대사와 함께 한국 불교를 이끈 대표적인 승려로 서당화상(誓幢和尙), 고선대사(高仙大師) 등으로 불렸으며 고려 숙종 때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대체로 원효대사(元曉大師)로 불린다...

통일신라 불교 계율종(戒律宗)

율종(律宗)은 북제(北齊)의 혜광(慧光)이 시작한 불교 종파로 계율을 중시하고 있다. 불교에서 계(戒)는 덕, 바른행동, 도덕, 계율 등을 말하여 넓은 의비로 도덕적인 행동 전체를 포괄한다, 중국의 계율종은 상부종(相部宗), 남산종(南山宗), 동탑종(東塔宗)으로 나뉘었으나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종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국의 율종은 계율종(戒律宗), 남산종 등으로 불리웠으며 신라 선덕왕 때 자장(慈藏, 590년~658년)이 종남산에서 유학한 후 돌아와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였다. 백제는 겸익(謙益)이 성왕 때 인도를 방문하여 율부(律部)을 배우고 귀국하여 백제왕실의 후원을 받아 백제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 사료에는 자장이 계율종을 열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통일신라 불교 법상종(法相宗)

한국의 법상종(法相宗)은 과 을 주 경전으로 하는 한국 불교 종파로 통일신라 때 진표(眞表)가 금산사(金山寺)에서 신라 법상종을 열었다. 진표는 미륵신앙이 강했으며 이론적 성격이 강했던 중국 법상종과는 달리 실천적인 불교로 바꾸었다. 진표는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통일신라 때 크게 번성하였다.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김제 금산사(金山寺),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등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사찰 규모가 상당히 크고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찰들이다. 은 인도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 현장이 번역하여 100권을 수록한 것으로 그중 15권에 해당한다. 법상종 사찰은 중국 시안 대자은사(大慈恩寺)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불경을 보관하던 목탑을 크게 중요시했으며 미륵신앙이 ..

통일신라 불교 화엄종(華嚴宗), 화엄십찰

한국의 화엄종은 의상(義湘, 625-702년)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 2대조사인 지엄(智俨, 602- 668년)에게 화엄종을 배운 후 670년 귀국하여 676년 왕명을 받아 봉황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면서 해동화엄종을 열었다. 화엄종은 을 근본경전으로 심원하교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는데 천태종과 함께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교학이다. 의상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오진(悟眞) , 지통(智通), 표훈(表訓) 등 10명을 화엄십성(華嚴十聖)이라 한다. 화엄종은 통일신라말까지 뛰어난 승려들을 배출하여 통일신라 불교의 주류로 자리잡았으며 선종이 주류로 등장한 고려시대에도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 의상은 670년 귀국하여 양양 낙산사 관음굴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사굴산문(闍崛山門)과 조계종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문(闍崛山門)이다. 사굴산문은 범일(梵日, 810~889년)이 846년에 강릉 사굴산 굴산사(掘山寺)에서 처음 열었다. 범일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16년간 머물다 847년 귀국하여 굴산사를 창건한 후 40여 년간 머물면서 선법을 베풀고 제자를 가르쳤다. 범일의 제자 행적은 당나라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이 가장 번창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 초 혜소국사 혜조(慧照)가 사굴산문을 이끌고 천태종에 밀려 위축되고 있던 선종을 크게 부흥시켰다. 그는 송나라에 유학하여 당시 유행하던 선풍(禪風)과 유교와 융합되는 경향을 체험했으며 왕명으로 송과 거란의 대장경 등을 가져오는 등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사굴산문..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봉림산문(鳳林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봉림산문(鳳林山門)이다. 통일산라 말 원감대사 현욱(玄昱, 787~869)이 봉림산문을 처음 열었다. 현욱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13년간 머물면서 선법(禪法)을 배웠으며 837년 귀국하여 남원 실상사에 머물다 왕명에 따라 여주 고달사(高達寺)를 크게 중창하고 선법을 베풀었다. 현욱의 제자 진경대사 심희(審希, 855~923년는 김해지역 호족의 후원을 받아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여 본격적으로 봉림산문을 형성하였다. 봉림사는 후삼국 전란 중에 지역 호족들이 몰락하며서 쇠퇴하여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여주 고달사는 고려초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번창하였다. 여주 고달사(高達寺) 여주 고달사는 창건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구산선문 봉림산파를 ..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사자산문(獅子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통일산라 말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 ~ 868년)이 처음 열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의 제자 징효 절중(折中, 826 ~ 900년)에 의해 산문이 형성되었다. 도윤은 28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 22년간 머물며 선법(禪法)을 배웠으며 당나라 회창폐불로 847년에 귀국하여 선법을 베풀었다. 금강산에 머물다 말년에 화순 쌍봉사에서 머물다 입적했다. 징효대사 절중은 금강산에서 철감선사에 선법을 배웠으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면서 수행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자산문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화순 쌍봉사(雙峯寺) 등이 있다. 영월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현 법흥사)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사자산 중턱에 위치한 법흥사(法..

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성주산문(聖住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이다. 통일산라 말 문성돵 때(846년) 무염이 보령 성주사에서 처음 열었다.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은 무염은 태종 무열왕 8대손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20여년 동안 머물면서 선(禪)을 배웠다.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에서 머물면서 베풀면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그중 현휘는 고려 태조에 의해 국사가 되었으며 충주 정토사에서, 대통은 제천 월광사에서, 여염은 양평 보리사에 머물면서 선법을 선양하였다. 성주산문은 고려초 왕실을 후원을 받아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강 일대에 주요 사찰들이 위치하고 있다. 낭혜화상탑비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당대 최고 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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