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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불교 계율종(戒律宗)

문화유산이야기 2021. 6. 9. 19:56 Posted by young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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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종(律宗)은 북제(北齊)의 혜광(慧光)이 시작한 불교 종파로 계율을 중시하고 있다. 불교에서 계(戒)는 덕, 바른행동, 도덕, 계율 등을 말하여 넓은 의비로 도덕적인 행동 전체를 포괄한다, 중국의 계율종은 상부종(相部宗), 남산종(南山宗), 동탑종(東塔宗)으로 나뉘었으나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종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국의 율종은 계율종(戒律宗), 남산종 등으로 불리웠으며 신라 선덕왕 때 자장(慈藏, 590년~658년)이 종남산에서 유학한 후 돌아와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였다. 백제는 겸익(謙益)이 성왕 때 인도를 방문하여 율부(律部)을 배우고 귀국하여 백제왕실의 후원을 받아 백제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 사료에는 자장이 계율종을 열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말 5교 9산의 불교 종단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 계율종과 관련된 사찰은 삼국시대 호국사찰을 대표하는 경주 황룡사, 부여 왕흥사와 자장이 창건한 양산 통도사와 전국 5대 적멸보궁을 들 수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국보290호)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자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넓게 만든 2층 기단 위에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올려놓고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국보 290호)>

양산 통도사(通度寺)

경남 양산시 영축산 기슭에 있는 통도사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여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불보사찰로 불린다. 통도사가 창건될 때 자장율사가 계단(戒壇)을 쌓고 득도를 시켰다고 전하며, 신라 불교에서 계율 근본도량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였는데, 고려시대 이후 크게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를 모신 영산전(靈山殿)을 중심으로 한 하로전(下爐殿),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있는 중로전(中爐殿), 금강계단이 있는 상로전(上爐殿)의 삼원(三院) 형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

하로전 영역은 석가여래를 모신 영산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과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배치하였다. 영산전 맞은편 남쪽에는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누각건물인 만세루를 두고 있다. 크고 작은 요사채들은 사찰입구와 영산전 뒷편에 배치되어 있다. 건물들이 크고 웅장한 것은 아니지만 절제되면서도 격식을 갗추고 있다. 불전과 강당, 요사채 등의 공간 배치가 개방적이면서 질서를 잘 갖추고 있다. 

<하로전 영역 영산전과 삼층석탑(보물 1471호)>
<영산전(보물 1826호)>

영산전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표현한 팔상도가 모셔져 있으며, 내부 벽면에는 다보탑을 표현한 <견보탑벽화>를 비롯하여 총 50점의 벽화(보물 1711호)가 그려져 있다. 영산회상탱(보물 1353호), 팔상도(보물 1041호)가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

<영산전 내부>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
<아미타여래을 모신 극락보전>
<강당 건물인 만세루>
<범종각>

중로전 영역은 비로자나여래를 모신 대광명전을 주불전으로 삼고, 그 앞으로 미륵보살을 모신 용화화전, 관세음보살을 보신 관음전이 일렬로 나란히 배치된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불전과 상로전 사이의 공간에는 석가여래 사리를 모신 내력을 기록한 세존비각,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한 건물인 개산조당과 해장보각, 불경을 보관했던 장경각 등이 배치되었으며, 동쪽편에는 요사채인 천자각과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영당 등이 배치되었다.

<중로전 영역>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미륵보살을 모신 용화전>
<용화전 앞 봉발탑(보물471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보물 1827호)>

중로전 불전들과 금강계단 사이의 공간에는 석가여래 사리를 모신 내력을 기록한 비석과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를 위한 건물 등이 세워져 있다.

<세존비각과 개산조당>
<해장보각.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다>
<자장율사 진영이 있는 내부>
<중로전 요사채>

상로전 영역은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대웅전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마당 양쪽에 응진전과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서쪽 공간에 통도사 창건 설화가 있는 작은 연못과 삼성각,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금강계단은 대웅전 서쪽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평상시에는 출입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상로전 영역은 공간배치에 규칙성을 있거나 의미를 두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며, 금강계단이 위치한 통도사의 중심영역으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금강계단 앞에 위치한 대웅전(국보290호)>

예불을 올리는 공간으로 건물 뒷편에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두고 있어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5칸으로 ‘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각방향에서 볼 때 정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동쪽에는 ‘대웅전’, 남쪽에는 ‘금강계단’,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계단과 적멸보궁>
<서쪽은 ‘대방광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나한을 모신 응진전>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적멸보궁(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원래 사리를 모시는 곳을 오르는 계단에 편의상 세운 전각이다. 예배장소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시대 신라 선덕여왕때인 643년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수행한 후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4대 적멸보궁은 영취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의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를 말한다. 적멸보궁은 자장이 세운 이래 불교에서 종교적 성지로서 역할을 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정선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경주 황룡사(皇龍寺)

황룡사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신라인이 신성시여겼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동궁(임해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때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지을려고 하다고 사찰로 고쳐지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진평왕대에 금당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과 금당에 모셔진 삼륙존상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여왕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9층목탑을 세워졌다. 삼국시대 불교는 국가를 통해 전래되었으며 국가 중심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왕실을 보호하고 발전을을 비는 호국신앙이 강했다. 경주의 많은 사찰 중 황룡사가 호국사상을 전담하는 역할을 했으며 계율종이 그 중심이 있었다. 

<경주 황룡사 모형(경주박물관)>

황룡사는 25,000여평의 넓은 부지위에 세워진 사찰로 중문, 목탑, 3금당, 강당이 나란히 배치된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사찰경내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중문터는  앞면 5칸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초석이 놓여 있고, 초석 크기로 2층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터>

신라 제일의 보물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레서 유학한 자장의 권유로 지었다고 한다. 목탑을 세운 내력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출토된 목탑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찰주본기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주도로 건축한 이 목탑은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로 현재 기준으로 30층 정도의 높이라 한다. 찰주본기에 따르면 경문왕 13년(873)에 크게 중건된 것으로 비롯하여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릴때까지 여섯차례에 걸쳐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목탑건물터에서는 찰주본기가 적혀 있는 사리함을 비롯하여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리기 위해 묻은 지진구도 함께 발견되었다. 

<목탑터>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는 심초석 사리구멍 안에 있던 사라갖춤 중 내함에 해당하는 것으로 1964년에 도굴된 것을 되찾았다고 한다. 탑을 조성한 경위와 871년에 중수한 내용을 새겨놓고 있다. 구층목탑을 세운 경위는 삼국유사와 큰 차이가 없으며, 삼국유사의 신빙을 더해 주는 유물이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
<황룡사 목탑 사리함>
<황룡사 목탑 지진구>

현재 남아 있는 황룡사 절터는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황룡사 금당에는 신라 삼보로 일컬어지는 장륙존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도 금당터에는 불상이 있었던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터>
<강당터>

황룡사 절터에는 무려 3만여점에 이르는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만든 시기도 삼국시대 진흥왕대부터 고려 고종대까지 다양하다. 이는 황룡사가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몽골에 의해 불타버릴때까지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황룡사지 출토 치미>
<황룡사 글자가 적혀 있는 기와>

부여 왕흥사(王興寺)

겸익(謙益)은 백제 승려로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로 여겨진다. 성왕 때 인도에거 율부(律部)를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귀국하여 백제 불교의 기반을 다졌다. 백제 무왕이 창건한 왕흥사는 백제를 대표하는 호국사찰로 여겨진다. 

왕흥사지(사적 427호)는 부여 부소산성 맞은편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의 옛 절터이다. 왕흥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사찰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으며 기와편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보, 청동사리합으로 구성된 사리구가 출토되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구이다.

<부여 왕흥사지>

가람배치는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형태로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왕흥(王興)’이라 글자가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편>
<왕흥사지 출토 치미>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국보 327호)는 바깥쪽에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제 사리합, 금제 사리병이 있다. 동, 은, 금으로 만든 용기에 사리를 모시는 백제 사리장엄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사리합 바깥에는 6행 2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찰의 건립시기와 배경,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리장엄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사리엄장구를 확인하는 양식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왕흥사지 출토 사리갖춤(국보 327호)>
<왕흥사지 맞은편 부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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