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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129

천안 병천 유관순열사 유적(사적230호)

천안 유관순열사 유적(사적230호)는 천안시 병천면 매봉산 일대에 있는 유관순 열사 생가를 비롯한 매봉교회, 유적비,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 등이 있다. 매봉산은 아우내 장터가 있는 병천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매봉산 동쪽에는 열사의 생가터와 매봉교회가 있고, 정상에는 3.1만세운동 당시 봉화를 올렸던 봉화대터가 있다. 천안시 병천면 일대에는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아우내장터를 비롯하여, 유관순열사 유적지, 1980년대에 세워진 독립기념관, 해방 이후 정치에 큰 역할을 했던 유석 조병옥 생가터가 있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여행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고장이다. 유관순열사 유적, 사적230호,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이곳은 기미년 독립운..

진천 농다리, 자연석으로 교각을 쌓은 전통 돌다리

진천 농다리는 진천읍을 지나 청원군을 거쳐 금강에 합류하는 미호천(세금천)을 건너는 오래된 돌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진천군 구곡리 마을은 상산임씨의 세거지로 이 다리는 고려 고종때 권신이었던 임연이 놓았다고 전해지는 다리라고 전한다. 자연석을 축대처럼 쌓아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장대석을 상판으로 올려놓은 구조로 그 형태는 일반적이 돌다리와 비슷하나 자연석을 이용해서 쌓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다리는 길이 93.6m, 너비 3.6m이다. 교각 사이의 폭은 80cm 정도이며, 원래는 28칸의 교각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24칸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쌓은 교각은 양끝을 뾰족하게 하여 물이 잘 흐르게 하고 있다. 천년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보수하면서 사용해 왔다고 하며, 웬만한 장마에도 무너지지..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와 임정요인(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묘역

일제가 도심공원으로 조성한 효창공원에는 해방 이후 귀국한 백범 김구선생이 항일투쟁을 하다 목숨을 바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해방되던 시기에 돌아가신 임시정부 주요 인사였던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묘역을 마련하면서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백범 자신도 1949년 흉탄에 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에 묻혔다. 이곳은 원래 정조의 맏아들로 어린나이에 죽은 문효세자의 능역인 효창원이었던 것으로 구한말까지 상거래이 중심지였던 마포나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넓은 능역이 남아 있었던 곳이다. 효창공원을 들어서면 정면에 이곳에 처음 묘역을 조성한 삼의사 묘역이 있고, 동쪽편 언덕에는 임정요인의 묘역이, 서쪽편 언덕에는 마지막으로 조성한 백범 묘역과 백범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백범 묘역 아..

서울 효창공원, 백범 김구선생 묘역

효창공원에 위치한 백범 김구선생 묘역이다. 김구선생은 일제강점기에 공원이 되었던 효창공원에 해방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소를 이장하였고, 본인도 1949년 흉탄에 쓰러진 후 삼의사와 함께 이곳에 묻혔다. 이런 연유로 효창공원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효창경기장이 들어서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묻히지 못하게 됨으로써 도심공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면에서 약간 아쉬운점이 있기는 하지만, 국립현충원과 달리 많은 사람이 오가는 도심공원에서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백범 선생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2002년에 백범 김구선생의 생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된 백범기념관이 묘역부근에 세워졌다. 효창공원..

고양 행주산성(사적56호), 임진왜란 행주대첩 현장이자 서울 해맞이 장소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우리에게 아주 가까히 있는 유적지이다. 행주산성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석축으로 성벽을 쌓고 사방에 문루가 있는 전형적인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고, 한강과 창릉천으로 둘러쌓여 있는 덕양산의 지형적 장점을 이용하여 산을 둘러서 토성을 쌓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삼국시대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백제가 쌓은 토성들은 조선시대에 석축성으로 바뀌었는데 행주산성은 서울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조선시대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곳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후손들이 찾는 역사유적지이다. 행주산성은 일산으로 가는 자유로에 자리잡고 있어 눈에 익은 명소이기는 하지만 자주 방문..

파주 윤관장군묘(사적 323호),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한 윤관장군 무덤

경기도 파주에 소재한 고려시대 명장이자 문신인 윤관 장군의 묘역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고려중기 중원을 제패한 금나라가 성립되기 직전에 무장인 척준경과 함께 여진족을 제압한 인물로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으며,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윤관 장군의 무덤은 조선초기 후손들이 조상의 무덤의 위치를 찾지 못했단 다른 사람들이 무덤처럼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조선중기 문신인..

파주 심지원묘 및 신도비, 조선시대 최대.최장의 소송이 있었던 역사의 현장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인 심지원(1539~1662)의 묘이다. 이 무덤은 조선시대 최대이자 최장이었던 소송의 주인공으로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한 윤관장군의 묘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최근에 양쪽 집안간에 화해가 이루어져 현재의 위치로 무덤을 옮겼다고 한다. 심지원은 조선중기 인조.효종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병자호란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다가 인조 21년에 복직되어 효종대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산송(山訟), 무덤의 조성과 관련 소송을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이 일반인에게 널리 유행하면서 명당을 둘러싼 소송이 빈번하였다. 산송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다른 사람 또는 집안의 묘역을 침범하면서 많이 발생했는데, 처음에는 지역의..

파주 삼릉(사적205호), 한명회의 두딸인 장순왕후 공릉, 공혜왕후 순릉과 영조 장남 진종의 영릉이 모여 있는 곳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위치한 파주삼릉은 조선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무덤인 공릉, 성정의 원비인 공혜왕후의 순릉과 영조의 장남인 추존왕 진종(효장세자) 부부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초기 세조반정의 공신인 한명회가 세자빈으로 들였던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가 세자빈시절에 죽으면서 세자빈 무덤을 만들면서 조성되었으며, 한명회의 딸로 성종의 원비가 된 공혜왕후가 죽으면서 부근에 왕비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세조와 함께 단종을 몰아내고 권세에 올랐던 한명회가 두딸이 세자빈과 왕비가 되었으나 이른나이에 죽자 직접 두딸을 위해 조성한 능역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파주 삼릉은 다른 왕릉과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서오릉에 세조의 장자 덕종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영릉,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

파주 소령원(사적358호)과 수길원, 영조의 어머니 '동이' 주인공 숙빈 최씨와 후궁 정빈 이씨의 묘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은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이자 숙종대 장희빈, 인현왕후와 함께 TV사극과 역사소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 중 한명인 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묘소이다. 고려중기 윤관장군 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소령원은 지금은 일반에 개방하지 않고 있는 곳으로 조선 왕족들의 무덤인 능원 중에서는 비교적 먼곳에 위치하고 있다. 숙빈최씨는 인현왕후 일가에 관계가 있었다고 하며 인현왕후를 모시는 무수리였는데 숙종의 눈에 띄어 숙원이 되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후에 영조가 된 연잉군은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낳은 2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영조는 효심이 지극했으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임을 숨기지 않았고, 어머니와 관련된 많은 일화들이 구한말 조선왕실들 사이에 전..

파주 삼릉(사적 205호) 영릉, 영조의 첫째 아들로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의 능

파주 삼릉 중 제일 마지막으로 조성된 영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장자이자 사도세자의 형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효장세자는 영조가 즉위한지 4년되는 해인 1728년에 어린 나이로 죽었기때문에 처음에는 왕자의 묘로 조성되었다. 이후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죽은 후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1908년에는 다시 황제로 추존되었다. 이런 추존 내력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지석에 기록되어 있다.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왕자의 묘에서 왕릉으로 격상되었지만 봉분과 석물은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난간석과 무인석이 없다. 영릉의 조성 경위와 절차, 부장품 등에 대한 기록은 의궤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

파주 삼릉(사적205호) 순릉, 조선 9대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 능

사적 205호로 지정된 파주 삼릉 중 처음부터 왕릉 형식으로 조성된 순릉이다.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의 능이다. 공혜왕후 순릉은 조성 당시부터 왕릉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봉분 주위에는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각각 두 쌍의 석호와 석양이 봉분을 등지고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공혜왕후는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이끌었던 조선초기 훈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인 한명회의 딸로 예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순왕후와는 자매사이다. 공혜왕후는 성종을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하여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와 한명회가 결탁하여 12세에 성종이된 잘산군과 혼인하였으며, 성종의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19세의 어린나이에 ..

파주 삼릉(사적205호) 공릉, 조선 8대 예종 원비 장순왕후 능

파주시 봉일천리에 위치한 삼릉(사적205호) 중 첫번째로 조성된 공릉이다. 공릉은 조선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 한씨를 모신 능이다.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킨 주역으로 지금도 역사소설이나 TV드라마 등을 통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당대의 권력자였던 한명회의 딸로 세자빈 시절에 인성대군을 낳고 죽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공릉은 원래 세자빈묘로 왕릉에 비해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당대 권력자의 딸이었기도 했기때문에 웅장함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순왕후는 성종대인 1472년에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사적 205호로 지정된 파주 삼릉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를 모신 영릉, 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를 모신 순릉, 21대 영조의 장자이자 정조의 양아버지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를 모신..

파주 공효공 박중손 묘역내 장명등(보물1323호)

임진강 하류와 가까운 파주시 탄현면 오금리마을에 있는 보물 1323호로 지정된 장명등이다. 무덤 앞을 장식하고 있는 석물 중 불을 밝히는 의미를 갖고 있는 장명등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특이한 문화재이다. 이 장명등은 조선초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집권한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신 박중손의 묘역에 세워진 것으로 전형적인 조선초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명등은 화사석과 대좌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창을 원형과 반월형으로 조각한 특이한 형식을 하고 있다. 화사석으니 네모난 창은 땅, 원형은 해, 반월형을 달을 의미하고 있으며, 장명등은 전체적으로 우주를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인 공효공 박중손은 세종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박사를 비롯하여 홍문관, 사헌부 등 청직이라 할 수 있는 ..

상주 왕산역사공원, 옛 상주목관아가 있었던 자리

상주시 도심 옛 상주목 관아가 있었던 지역 주변에 위치한 왕산은 상주의 중앙에 위치한 명산이며 상주 사람에게 주는 별다른 상징적 의미를 주는 곳이라 한다. 이곳은 상주 도심 상업지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근에 부근 지역을 정비하여 도심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왕산은 삼국시대 신문왕때(687년)에 신라가 상주성을 쌓고 지역 중심지로 삼은 곳으로 고려말 홍건적 침입때 공민왕이 이곳에 피난하여 상주목 관아를 임시행궁으로 삼으면서 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왕산주변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을 개국할 때 이곳에 경상감영이 있었다고 한다. 상주목 관아를 둘러쌓던 상주읍성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관아건물로는 문루인 태평루, 객사인 상산관이 북천임란전적지로 옮겨져 있으며, 관..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임진왜란초기 관군과 왜군이 전투를 벌렸던 전적지

상주시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변에 자리잡은 임란북천전적지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동래에서 첫 전투를 벌이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에 맞서 조선 관군이 벌렸던 사실상 첫 전투를 벌렸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상주는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문경새재로 통하는 길과 충북 보은을 통해 청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라 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조선관군은 상주목 판관이었던 권길과 중앙에서 파견된 순변사 이일을 비롯하여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힘을 합쳐 왜적을 막아보고자 했으나 전국시대 오랜 전쟁을 통해 단련된 왜군에게 크게 패하고 많은 이들이 순국하였다. 당시 이곳에서 참전하여 순절한 윤섬, 권길, 김종무, 박호, 김준신, 김..

진주성 의기사와 의암바위, 논개 영정을 모신 사당과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진주성은 남해안 지역에서 섬진강을 따라서 남원을 거쳐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막고 있는 국방상 중요한 요지이다. 이곳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중 왜군과 2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였던 진주대첩으로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는 2만여명의 왜군을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3,800여명의 관군이 치열한 공방전 끝에 물리친 전투였으며, 2번째는 정유재란때 3만여명의 대병력으로 공세를 펼친 왜군에 맞서 3천여명의 조선군이 공방을 벌려 끝내 진주성이 함락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때 왜군의 대공세로 펼쳐진 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비롯하여 많은 관민들이 왜군의 공세에 거세게 저항했으나,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수만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고..

서울 을지로 훈련원공원, 조선시대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원 옛터

훈련원은 조선시대 군사의 훈련과 무반을 양성하던 관청으로 고려말에 처음 생긴이래로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종대에 훈련관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역사공원(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처음 생겼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훈련원은 무예를 훈련하고 병서와 진법등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정3품 사(使)를 중심으로 군자좨주, 사마, 사직, 부사직, 참군, 녹사 등의 관직을 두었다고 한다. 훈련원의 중요한 역할은 관리를 뽑는 무과를 주관하는 등 무관을 선발하는 일과 궁왕직속 부대라 할 수 있는 내금위 등의 훈련을 주관하고 각 부대의 병기를 검열하는 등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훈련원은 그 역할이 조금씩 변하기는 했으나 구한말까지 존재했다가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해체되었다. 서울 을지로5가에 위치한 훈련원공원은 옛..

여주 영릉(사적 195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릉

여주 영릉은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정비 소헌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1469년 여주로 이장하면서 세조 때 만들고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난간석에서 영저(靈杵), 영탁(靈鐸), 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왕릉 난간석의 기본을 확정하였으며, 혼유석을 받치는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을 기존의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간 문자로 표현하였다.입지를 보자면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했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

여주 효종 영릉(사적195호),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에서 북동쪽으로 700여m 정도 떨어진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왕릉이다. 효종의 능은 원리 구리 동구릉 건원릉 서쪽편에 있던 것을 현종대인 16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 석물에 틈이 있어 봉분안으로 비가 샐 염려가 있다는 여론이 있어서 능을 옮기기는 했는데, 실제로 별 문제가 없어 이에 연루된 인사들이 면직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산릉의 조성과 천장 등에 관련하여 세력간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는 동원상하릉으로 효종 영릉이 최초의 사례이며 이후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단지 왕릉을 두르는 담..

남양주 홍유릉 유릉(사적207호), 조선왕조 마지막 순종의 능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왕조 마지막 왕이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유릉이다. 순종이 승하한 1926년에 조성된 유릉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원례는 새로 즉위한 왕이 국장을 주관하지만, 순종의 장례식은 당시 이왕직 장관이었던 민영기가 주관하였다. 기존의 왕릉과는 달리 황제의 예를 능을 조성한 홍릉과 거의 비슷하게 조성하였다. 왕릉의 석물들을 현대 조각상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나 일제가 영향을 미친 부분이 많은 왕릉이기도 하다. 순종의 능을 조성한 이후 서울 광진구 유강원에 있던 순명효왕후를 함께 모셔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유릉의 조성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지만, 마지막으로 합장된 순정효황후가 해방 이후 1966년에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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