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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시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변에 자리잡은 임란북천전적지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동래에서 첫 전투를 벌이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에 맞서 조선 관군이 벌렸던 사실상 첫 전투를 벌렸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상주는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문경새재로 통하는 길과 충북 보은을 통해 청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라 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조선관군은 상주목 판관이었던 권길과 중앙에서 파견된 순변사 이일을 비롯하여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힘을 합쳐 왜적을 막아보고자 했으나 전국시대 오랜 전쟁을 통해 단련된 왜군에게 크게 패하고 많은 이들이 순국하였다. 당시 이곳에서 참전하여 순절한 윤섬, 권길, 김종무, 박호, 김준신, 김일, 박걸 등은 당시 권문세가 출신이거나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등 촉망받던 젊은 관료들이거나 지역에서 명망이 있었던 인사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순국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상주임란북천전적지는 북상하는 왜군에 맞서 관군과 의병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왜군과 전투를 벌렸던 곳으로 지금은 순국한 이들을 모신 사당을 중심으로 옛 상주목 관아 객사인 상산관, 관아 문루인 태평관, 관아에서 운영하던 정자인 침천정 등을 옮겨놓고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전적지를 둘러보면서 옛 상주목 관아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도심공원이라 할 수 있다.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경북 상주시 만산동
이곳 북천변 자산 기슭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시 왜군에 대항하여 우리 관군과 의병들이 격전한 전적지이다. 이 전투에서 순변사 이일이 인솔한 관군과 상주지방에서 창의한 의병들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서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과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수많은 군사들이 순절하고 패전하였으나 임란사상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첫 전투라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 1990년부터 사당, 전시관, 사적비 등을 세우고 원래 있었던 박걸 단소 및 권길 사의비를 이건하여 사적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출처:상주시청>


상주 임란북천전적지는 사당인 충렬사를 중심으로 상주목 관아 건물인 객사, 정자, 문루 등을 옮겨놓아 상주목 관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상주 임란북천전적지에 들어서면 언덕에 옛 상주목 관아 문루인 태평루를 볼 수 있다.


충렬사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당이 있고, 그 앞에는 비각과 관련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전시관이 있다.


충렬사 사당. 충렬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이일의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에서 파견되었던 관료들과 상주목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등 상주목 관리들과 의병장 김준신, 김일, 무명용사 1인 등 9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렬사에 모셔진 위패들


이 비각에는 임진왜란(1592년) 때 이곳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3충신(종사관 윤섬.박호.이경류)와 2의사(의병장 김준신.김일)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충신의단비' 복제본과 상주목판관으로 봉직 중 순국한 권길의 충절을 새겨 둔 '판관권길사의비'가 보호되고 있다. '충신의사단비'는 1793년(정조17)에 사액 받아 충의단에 비를 세웠는데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충의단에 있는 비와 똑같이 복제한 것이며, '판관권길사의비'는 창석  이준 선생이 찬하여 1689년(숙종24)에 건립된 충렬사에 세웠는데 충렬사가 훼철되면서 자산 아래로 1991년에 임란북천전적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출처:상주시청>


충렬사 재실 용도로 지어진 건물


관련 유물들을 전시한 전시관

상주와 북천전적지 개관
상주는 우리 역사상 고대 성읍국가 시대부터 사벌국과 고령가야국이 존재하였던 유서깊은 고장으로 신라시대 9주, 고려시대 8목 중 하나로 웅주였다. 또한 태조원년(1392)부터 1593년까지 200여년 간 경상감영을 둔 곳으로 경상도의 뿌리가 되었으며 '영남'이란 이름을 탄생시킨 고장이다. 상주는 전통어린 역사의 도시이자, 문학.학문.교육.민속.농학 등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정립하고 영남학파의 근간을 이룬 선비의 고장이며, 몽고군의 침입과 임진왜란때에도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절의 고장이고, 찬란한 불고, 유교 문화를 일으킨 고장이다. 특히 이곳 북천전적지는 임진왜란(1592년) 때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조선관군과 왜군의 선봉주력부대가 최초로 싸운 장소로 900여 명이 순국한 호국성지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 북방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1만7쳔여명에 대항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이후 유림의 뜻있는 분들이 이 성스러운 자리를 보존하고, 순국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만대에 전하려는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충렬사와 충의단의 배향인물 후손 중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늘어나 '상주 임란 북천전적지 정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위원회를 주축으로 이곳을 정화하여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충렬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이일의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무명용사 1위 등 9인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다. <출처:상주시청>

상주전투
왜군들의 침략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4월17일, 이일을 순벼사로 임명하고, 성웅길.조경을 각각 좌우방어사로 삼아 영남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이일이 군사를 모아 명령을 받은지 3일만에 출정하였고, 경상감사 김수도 열읍에 공문을 보내 수령들로 하여금 각자 소속군사를 이끌고 정해지 지역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고을 수령들은 각기 군졸들을 이꼴고 대구 냇가에 나가 순변사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수일이 지나도 순변사가 오지 않고 왜군의 북상 소문이 들리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비가 내리는데다 군량미 마저 끊기자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일은 문경을 거쳐 4월23일 상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는 상주목사 김해가 이미 적을 피해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판관 권길만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이일이 판관을 시켜 관아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백성을 모으고,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게 하여 수백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조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급히 상주 북방 북천에 진을 치고 대오를 편성하여 서울에서 내려온 장졸들 등과 함꼐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이일 휘하의 장졸들은 산을 의지하고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하여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등 900여 명이 순국하였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 중앙에 패보를 전한 다음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으나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출처:상주시청>


교지

이일(1538~1601년), 조선중기의 무신, 1558년(명종13) 무과에 급제하여 경성판관 등을 거쳐 1583년(선조16) 전라좌수사.경원부사를 지냈다. 1587년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니탕캐의 난을 평정하고,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인 1588년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을 소탕하여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1589년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정언신 등과 변방의 군비상황을 의논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북상하는 왜적들과 상주에서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 충주의 두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채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사잇길로 도망하여 황해.평안도로 피하였다. 이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에서 왜적 80여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가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그를 용서하였다. 그뒤 지충추부사.비변사당상.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 치안유지에 힘썼고, 충청도에서 송유진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그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주였다는 살인죄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이 있다. <출처:상주시청>


교지


윤섬 교지와 문열공시장. 윤섬(1561~1592년), 조선중기의 문신. 1583년(선조16)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주서.정자.고리.정언.지평 등을 두루 거쳤다. 1587년에는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으로 오기된 명나라의 기록을 정정하였는ㄷ, 그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에 녹훈되고 용양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교리로 있던 1592년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이 되어 상주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해오는 유물로 교지와 시징 등이 있다. <출처:상주시청>

권길(1550~1592년). 조선중기의 문신. 권근의 후선이며, 음보로 기용되어 관력은 상주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앙에서 내려온 군사와 합세하여 상주 북천전투에서 왜군의 진격에 맞서 싸웠다. 당시 왜적과 전투를 벌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니, 호장 박걸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였고, 최선을 다하여 싸웠으나 무기와 군사의 열세로 패하여 전사하였다. 후에 상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출처:상주시청>


교지

김종무(1548~1592년), 조선중기의 문신, 부제학 증 이조판서 김취문의 아들이며, 문충공 류성룡의 매부이다. 1591년(선조24) 오수도찰방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근도찰방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북상하자 역졸을 거느리고 상주로 와 순변사 이일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후 상주판관 권길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상주 북천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공으로 인해 1675년(숙종1) 충신으로 정표되고 그의 향리에 정려각이 건립되고 정려비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1721년(경종1)에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1790년(정조14)에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남강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871년(고종8)에는 다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려각은 1896년(고종33)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상주시청>

이경류(1564~1592년), 조선 중기의 문신.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591년(선조2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9월에 식년문과에 급제,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조좌랑으로서 조방장 변기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으나 그의 소재를 알지 못해 이일의 진중에 머물렀다. 그후 상주 북천전투에서 상주판관 권길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상주의 충신의사단에 배향되었다. <출처:상주시청>


교리공유사, 서행일기

박호(1567~1592년). 조선 중기의 문신, 1584년(선조17) 18세로 친시문과에 장원하여 수찬,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이 되어 상주 북천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윤섬.이경류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시 함양사람 인언룡에게 말하기를 "나는 18세에 장원급제하여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전세가 불리하니 내가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왕을 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에 직제학에 추증되었고, 상주 충의단에 배향되었다. <출처:상주시청>


필원잡기, 일기부잡록, 절곡선생유적

김준신(1561~1592년), 상주 지방의 선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32세에 의병을 모아 솔영장이 되어 상주목사와 함께 칠곡 석전까지 전진하였다. 그후 다시 상주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왜적과 맞서 싸웠으나 수적인 열세로 인하여 끝내 임진년 4월 25일 장렬히 순국하였다. 한편 왜군은 김준시에게 당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해 공의 생가인 화동면 판곡리로 쳐들어왔으며, 왜군에게 의해 공의 일가가 도륙당하였다. 후에 사헌부 집의(봉3품)에 추증되었다. 유적으로 김준신의사제단비가 화동면 판곡리에 있으며, 교지.절곡집.순의단유사 등의 유물이 전해오고 있다. <출처:상주시청>


증손향약

김일(?~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비방에서 향병 500명으로 창의하여 상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왜군과 전투하다가 순국하였다. 당시 무남독녀인 딸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낙동면 화산리에 안장하는 등 효심을 보였다하여 후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는데, 그떄 지은 효녀각이 낙동면 내곡리에 있다. 사헌부 집의(종3품)에 추증되었다.  <출처:상주시청>

박걸(1568~1592년). 임진왜란 당시 상주목의 호장으로 목사와 판관이 감사의 영을 받아 출병한 뒤 성을 지켰다. 이후 상주 북천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5세로 순국하였다. 후에 장악원정에 추증되었다. <출처:상주시청>



관련 유적 및 유물
조정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 조정(1555~163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조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후에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김성일의 문인이었고, 정구와 교유하였으며, 경술과 문장이 뛰어났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에 봉향되었다. 임진왜란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국토수에 앞장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이후 상주.함창은 물론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의병활동과 왜군들의 갖가지 만행을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검간문집'과 '진사록', '임란일기', '남행록' 등의 여러 저작물을 남겨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출처:상주시청>


조정의 임란일기, 남행록

이전의 형제급난도
형제급난도는 임진왜란 때 정경세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이준이 백화산 전투에서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죽음을 무릅쓴 채 동생을 업고 전장을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한 형 이전(1558~1658)과의 우애를 그림으로 그리고 이를 찬양한 여러 사람의 글을 수록한 책이다. 이준(1560~1635년)은 조선중기늬 문신이다. 류성룡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하였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으며, 그뒤 정경세와 함께 의병 수천명을 모집하여 고모담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저서로는'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를 편찬하였다. <출처:상주시청>


형제급난도

임진왜란 무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무기는 궁시.창.도검.총통.비격진천뢰.화차.신기전 등이 있었다. 활과 화살은 전통적인 전투무기의 하나로 특히 조선의 활은 정교함과 성능의 우수함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중 편전은 화살이 작아 가볍고 가속도가 크고 관통력이 뛰어났는데 사정거리가 천보 이상이나 되어 일본의 조총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의 주요 병기로 사용되었다. 창은 평지에서 접근한 상태에서 긴 장태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모, 극, 창 등 세종류가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사용된 창은 길이가 짧아 전투용으로서의 기능이 약했을 뿐 아니라, 장병술의 발달로 궁시에 비해 그 비중이 낮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단병기에 관심이 높아져 다양한 창이 개발되었다. 총통은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는 병기로써 성을 공격하거나 적의 함선을 파괴하는데 상당한 성능을 발휘하였다. 총통은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이름이 붙여 지는데 가장 큰 것이 천자총통이고 점차 지.현.황의 순으로 작아졌다. 소형 총통에는 승자총통.소승자총통.중승자총통.대승자총통.별승자총통 등 승자총통 계열이 있다. 이밖에도 로켓의 일종인 신기전과 다연장 로켓발사기인 화차 그리고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 질려포 등이 있었다. 도검은 개인 휴대용무기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호신용 의미가 강해 전투무기로서 비중이 매우 낮았으나 임란을 통하여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었다. 당시 백병전에 능한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길고 예리한 왜검과 비슷한 성능의 무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도검은 왜검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량되었다. <출처:상주시청>


각궁, 화살촉, 당파, 화살


천자총통, 승자총통


일본군 무기 조총과 일본도


상주 임란북천전적 기념조형물


충렬사에 세워진 비석


유적지 앞을 흐르는 북천과 상주도심


옛 상주목 관아 객사 건물인 상산관


상주목관아 정자인 침천정


관아문루였던 태평루


태평루 옆으로 옮겨놓은 공덕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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