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도심 옛 상주목 관아가 있었던 지역 주변에 위치한 왕산은 상주의 중앙에 위치한 명산이며 상주 사람에게 주는 별다른 상징적 의미를 주는 곳이라 한다. 이곳은 상주 도심 상업지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근에 부근 지역을 정비하여 도심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왕산은 삼국시대 신문왕때(687년)에 신라가 상주성을 쌓고 지역 중심지로 삼은 곳으로 고려말 홍건적 침입때 공민왕이 이곳에 피난하여 상주목 관아를 임시행궁으로 삼으면서 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왕산주변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을 개국할 때 이곳에 경상감영이 있었다고 한다. 상주목 관아를 둘러쌓던 상주읍성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관아건물로는 문루인 태평루, 객사인 상산관이 북천임란전적지로 옮겨져 있으며, 관아 건물 중 하나인 향청이 도심내 원래 자리에 남아 있다.
상주는 삼국시대에 지역중심지로서 터를 잡은 이래로 행정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유지해온 지역이다. 신라 법흥왕때인 523년 지방행정구역인 2경 5주 중 하나인 상주가 설치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사벌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려시대부터 상주라는 지역이름이 계속 사용되어 왔다. 고려가 지방제를 정비하면서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상주목이 설치되었으며, 조선 세종때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임진왜란때 대구로 이전될때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옛 상주목 관아가 있던 왕산주변에는 지금도 우체국, 상공회의소 등 공공기관들이 남아 있으며, 왕산아래는 상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상주의 중심 왕산의 유래
왕산은 고도 상주의 중앙에 자리한 명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31대 신문왕7년(서기687년)에 주위 1천1백9보의 상주성을 쌓고 성의 4대문 중앙에 자리한 작은산이 왕산이다. 고려31대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 침략으로 고려왕실이 상주목 상주성을 임시거처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 작은 산이 고려왕실의 산이 되었다. 1700년대 제작된 상산지도에는 왕산을 배경으로 관아들이 있었으며 조선조 1393년(태조원년)부터 1592년까지 경상감영을 겸한 곳이 이 왕산 아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 상산삼악(갑장, 노음, 천봉)을 일컬어 오면서도 왕산을 영산으로 여겨왔으며 1617년 창석 이준이 편찬한 상산지에 의하면 상주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이 왕산이었기 때문에 이 왕산을 일명 장원봉이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때 왕산 이름을 앙산으로 하였다가 최근에 왕산으로 바로 잡았다. 창석 이준선생이 『왕산과정』시를 남겼고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산이 왕산이며 장원봉을 중심으로 왕산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출처:상주시청>
상주시 도심에 위치한 왕산역사공원. 왕산은 해발 50m도 되지 않은 낮은 도심의 뒷동산이지만, 이곳에 신라가 읍성을 쌓은 이래로 그 중심이 되었던 산으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지역을 거쳐간 수령들은 위해 세운 공덕비를 이곳에 옮겨놓고 있다.
왕산아래 복원해 놓은 작은 정자와 연못
왕산공원으로 옮겨 놓은 상주 복룡동 석불좌상(보물119호), 이 불상은 상주도심 동쪽편 복룡동 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놓았다고 한다.
왕산 정상 산책로
관아가 있었던 오래된 지역임을 말해주는 고목들
상주를 대표하는 인물인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왕산아래 세워진 작은 정자
왕산공원 아래 상주 중심지로 남북방향의 큰 길과 동서방향의 큰길이 만나는 사거리이다. 이곳 동쪽편에 관아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주요 공공기관이 자리잡고 있다.
왕산 앞 상주도심을 동서를 가로지르는 큰 길. 이곳은 상업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왕산 동쪽 큰길 주변에 상주목 관아 건물들이 주로 들어서 있었다. 지금도 경찰서, 우체국, 상공회의소 등 주요 공공기관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
상주목 객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상주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다.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진 상주목 객사 건물인 상산관. 상주목 관아의 중심건물로 앞면 14칸 규모로 전주객사와 함께 지방관아 객사 건물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관아 문루인 태평루 또한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져 있다.
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공공기관 건물.
상주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는 큰 길
왕산공원 동쪽편에는 상주목 관아건물 중 유일하게 원래 위치에 남아 있는 향청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청 관사로 사용되었기때문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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