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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삼릉 중 제일 마지막으로 조성된 영릉은 조선 21대 영조의 장자이자 사도세자의 형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효장세자는 영조가 즉위한지 4년되는 해인 1728년에 어린 나이로 죽었기때문에 처음에는 왕자의 묘로 조성되었다. 이후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죽은 후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1908년에는 다시 황제로 추존되었다. 이런 추존 내력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지석에 기록되어 있다.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왕자의 묘에서 왕릉으로 격상되었지만 봉분과 석물은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난간석과 무인석이 없다. 영릉의 조성 경위와 절차, 부장품 등에 대한 기록은 의궤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영릉
영릉은 추존왕인 진종(1719~1728)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진종은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이다. 1725년(영조1)에 왕세자가 되지만 1728년 10세의 어린나이로 돌아가셨다. 이후 효장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장세자로 불리었다. 효순왕후는 1727년(영조3)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1751년에 돌아가신 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진종의 옆자리에 모셔졌으며, 효순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순현빙으로 불리게 되었다.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돌아가신 후 두차례에 걸쳐 추존되었다. 영조는 1762년(영조38) 사도세자를 폐한 후, 당시 세손인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에따라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정조가 왕이 된 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무덤의 이름도 영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 황제인 순종에 의해 황제와 황후로 다시 한 번 추존되었다. 이러한 추존 과정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릉은 처음에 왕자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난간석과 무석인이 없다. <출처:문화재청>


파주 삼릉 중 제일 늦게 조성된 영릉. 영조의 맏아들이자 진종으로 추종된 효장세자와 효순왕의 능이다. 봉분은 부부의 무덤을 나란히 조성한 쌍분의 형태를 하고 있다.


홍살문에 정자각으로 이어진 참도가 직선으로 이어져 있고, 정자각 앞에는 넓게 박석을 깔아 놓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


정자각 내부


정자각 앞 마당


3번의 추존과정을 기록한 표석이 있는 비각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왕릉으로 격상되었지만, 봉분과 석물은 왕자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영릉으로 들어가는 길

영릉의 부장품
부장품은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도 살아 있었을 때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무덤 속에 넣는 물품이다. 조선왕릉의 부장품은 화려함보다는 예를 기반으로 소박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파주삼릉에 모셔진 인물 가운데 진종과 효순왕후의 부장품에 대한 기록이 각각의 상례 준비 과정을 기록한 의궤에 자세히 남아 있다. 의궤에 따르면 진종과 효순왕후의 부자움은 대례복과 장신구류인 복완, 실물보다 작게 만든 식기.제기.악기 등의 다양한 명기로 구성되어 있다. 진종과 효순왕후의 부장품 항목은 조금 다르다. 복식과 장신구류는 부부의 성별에 따라 달리 구성되었으며, 무기류는 남성인 진종의 부장품에만 있다. 이밖에 목노비, 목악인 등은 고대 순장 풍습의 흔적으로 조선초기부터 왕릉 부장품이었으나, 영조가 인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금지하여 효순왕후의 상례를 치를 때부터 조선 왕실 부장품 항목으로 넣지 않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효장세자의 장례과정을 기록한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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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 파주삼릉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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