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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129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익릉과 대빈묘,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과 장희빈의 묘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한 서오릉 중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과 한쪽편 구석에 위치한 장희빈의 묘소이다. 숙종은 원비로 인경왕후 김씨, 계비로 인헌왕후와 인원왕후를 두었고,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동이로 유명해전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세자나 세자빈 등은 원, 약간 격이 낮은 경우는 일반인처럼 묘라고 불렀는데,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는 대빈묘라고 불렀으며, 영조를 낳은 숙빈최씨의 무덤도 원래는 소령묘였는데 영조의 노력끝에 소령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숙종과 왕비의 능을 배치한 것을 보면 당시의 정치상황이 상당히 많이 고려되어 있었는데,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서인들의 입김이 많이 반영되어 인헌왕후는 숙종과 쌍분의 형태로 이루졌으며, 영조대까지 살았던 제2계..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경릉과 창릉, 세조의 두아들 덕종(추존)과 예종의 능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에 소재한 서오릉은 예종의 창릉과 숙종의 명릉을 비롯하여 많은 조선왕실을 능원이 조성된 곳으로 태조의 능이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많은 능원이 있는 곳이다. 서오릉은 1457년(세조3)에 의경세자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세조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 곳에 안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세조가 터를 잡은 곳으로 그의 맏아들인 덕종(추존)과 왕비,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과 왕비의 능이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서오릉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경릉은 세조의 장남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추존)과 어머니로 인수대비로도 많이 불리는 소혜왕후의 능이다. 서오릉 안쪽에 위치한 창릉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이다. 예종 또한 20세의 ..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명릉,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한 서오릉(사적 198호)은 구리의 동구릉과 함께 조선왕실 능묘 중 가장 큰 규모로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추존)과 왕비의 능인 경릉, 예종과 왕비의 능인 창릉, 숙종의 원비의 능인 익릉, 숙종과 계비의 능인 명릉, 영조 원비의 능인 홍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밖에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 등이 있다. 대체로 예종.성종대와 영조대에 조성된 왕릉이라 할 수 있다. 이 곳에 능지로 선택된 것은 1457년 세조의 장남(성종의 아버지로 덕종으로 추존)이 죽자 이곳을 세조가 답사한뒤 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면적은 약 51만평에 이른다. 서오릉에 모셔진 5곳의 왕릉 중 동쪽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

남양주 광릉(사적 197호),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광릉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경기도 남양주시에 소재한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 왕릉의 표준을 제시한 능으로 세조의 유명에 따라서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 이후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에 사용하였던 석실과 십이지신상 등을 새겼던 병풍석을 없애서 왕릉조성에 들어가던 경비를 크게 줄였다고 한다. 왕릉을 수호하는 것을 상징하던 12지신상 대신에 난간동자석주를 새기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능을 배치함에 있어서 정자각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릉이 양쪽 언덕에 배치되는 동원이강의 형식이 처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왕릉제도를 크게 바꾼 것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광릉을 지키는 원찰로는 근처에 위치한 봉선사가 있다. ..

북묘비, 관우 사당인 북묘에 세웠던 비석

중앙박물관 바깥에 전시되어 있는 북묘비이다. 구한말인 1883년 고종이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에 세웠던 중국 삼국시대 관우장군을 위해 세운 사당인 북묘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지금까지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구한말 비석 양식을 하고 있다. 비석에 적힌 내용은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등을 적고 있는데 고종임금이 직접 글을 짓고, 민영환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북묘비. 100년이 조금 넘은 비석으로 고종이 직접 글을 짓고, 을사늑약이 체결될때 자결한 민영환이 글씨를 썼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 민영환의 글씨로 글씨체가 상당한 단정하고 품격이 있다는 느낌이다. 북묘비, 1887년 이 비석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관우를 기리기 위해, 조선 고종 20년(18..

청계천 광통교, 종로와 남대문을 연결하는 도로 놓여 있었던 큰 다리

광통교는 원래 이름은 큰다리라는 뜻으로 대광통이었고 후대에는 광교로 불리웠다. 서울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연결되는 도로에 놓여진 다리로 조선시대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들 중 가장 큰 다리였다고 한다. 이 다리는 조선 태조때 토교로 만들었다가 태종대에 큰홍수로 무너진 것을 석교로 다시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복원된 광통교는 원래의 자리는 아니고, 상류방향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광통교는 종로와 남대문을 연결하는 큰 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8차선은 큰 다리가 새롭게 놓여져 있다. 현재 광통교가 있는 곳은 청계천이 시작하는 청계광장과 가까운 곳으로 청계천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청계천을 이용한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광통교를 축초하는데에는 조선 태조의 계비로 태종과..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보물 68호), 고려 중기에 세워진 효자비

경주시 황남동 마을에 세워진 보물 68호로 지정된 효자 손시양 정려비이다. 우리나라에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세우기 시작한 많은 효자비, 열녀비들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려 명종 12년(1182)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동경유수가 효자 손시양의 행적을 국가에 보고하여, 왕이 직접 포상하여 세운 효자비이다. 비석은 높이 2m로 단순한 네모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앞면에는 '효자리'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그의 행적으로 130자로 적어 놓고 있다. 이 비석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많은 비석가운데 불교와 관련되어 있지 않는 비석으로 고려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교적인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이 있는 황남동은 경주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지구인 대릉원 서쪽편에 위치한 오래된 마을로 ..

조선시대 물시계인 보루각자격루(국보229호)와 신기전화차

우리나라의 과학 유물의 대표적인 유물의 하나인 자격루의 원본은 지금 덕수궁내에 전시되어 있다. 덕수궁 마당 한쪽편에 전시되어 있는 국보229호로 지정되어 있는 보루각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에 만든 물시계다. 세종때 장영실 등이 만든 조선왕조의 표준시계였던 물시계를 개량하여 중종 때 유전 등이 개량하여 만든 것으로 자동시보장치는 남아 있지 않고 3개의 물그릇과 2개의 물받이통만 남아 있다. 원래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것을 이곳을 옮겼는데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물시계로 우리나라에서는 많지 않은 소중한 과학문화재이다. 자동시보장치가 있는 원래의 물시계는 최근에 복원되어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슷한 것으로 그 규모를 축소한 물시계가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고, 북경에도 시간을 알..

거북선(龜船), 원형과 가장 가깝게 복원된 해군사관학교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는 거북선

거북선(龜船)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만들오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헌을 한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배이다. 거북선은 고려말 또는 조선초에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것으로 많은 문헌상에 남아 있으나, 임진왜란 만들어진 창제귀선이 최초의 철갑선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해전에서 돌격용 전함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은 기존 조선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을 개량하여 상판에 철갑을 두르고, 거북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로 임진왜란 초기에 선봉함으로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때 만들어진 창제귀함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복원되어 있고, 널리 알려져 있는 거북선은 정조대에 쓰여진 '이충무공전서'에 그림으로 묘사된 전라좌수영에 있는 귀선으로 원래의 창제도선인과 같은지는 잘 알려져 ..

안양 만안교, 정조대왕 화성행차를 위해 놓은 조선후기 홍예 돌다리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천에 세워져 있는 조선후기를 대표한 돌다리인 만안교이다. 이 다리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참배를 자주하였는데 이를 화성행차라고 한다. 원래는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이 일반적인 경로인데 고갯길이 많아서 현재의 경부선 철도길과 비슷한 경로로 시흥을 거쳐서 수원으로 행차하였다고 한다. 이때 행차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다리가 안양 만안교이다. 조선후기 부흥기라고도 할 수 있는 영.정조대에는 조선사신들이 북경을 오가는며 청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 들였는데, 만안교 또한 청나라의 다리 건축방식을 참조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 석재로 쌓은 만안교는 교각사이에 아치형의 홍예를 하고 있어 무지개다리 또른 구름다리라고 한다. 다리의 폭은 마차2개가 교차하여 ..

논산 계백장군유적지, 계백장군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

충남 논산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계백장군과 황산벌싸움, 그리고 논산훈련소일 것이다. 이는 황산벌싸움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계백이라는 인물이 후대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계백장군이 이끌던 오천결사대의 황산벌 싸움과 관련된 유적은 실제로 거의 없고, 넓은 논산의 황산벌을 보면서 당시의 싸움을 상상할 뿐이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호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계백장군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중심으로 계백장군 유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계백장군무덤과 사당인 충장사, 백제군사박물관, 체험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근에 ..

강화 홍릉(사적 224호), 무인정권기 대몽항전을 이끈 고려 23대 고종의 능

강화도의 주산인 고려산 남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23대 고종의 능인 사적 224호로 지정된 강화 홍릉이다. 고려 고종은 최충헌 집권기에 왕위에 올라 대몽항전을 거치면서 몽고에 항복하기까지 약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고종은 최충헌 일가가 집권하던 시기였기때문에 실권없었던 최씨정권을 몰아내고 몽고와 강화를 했던 그해에 죽어서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강화에 묻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의 재위기에는 무신정권기란 어려움도 있었지만 몽골이 동아시아는 물론 중동과 서구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세계사적으로도 격변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고려도 거란.몽골 등의 침입을 받아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유산의 손실도 상당히 컸던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팔만대..

강화 교동도 화개산 봉수대와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

강화도 서북쪽 한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교동도의 주산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개산은 해발 269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주위에 높은 산이 없어서 북한의 연백평야를 비롯하여 서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아주 좋은 산이다. 화개산은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특징때문에 삼국시대 이래로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으며, 광개토대왕이 한성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산성을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고려시대에 쌓은 화개산성의 석축들이 일부 남아 있다. 화개산 정상 동쪽편에 있는 연봉 정상에는 조선시대 비상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 석단이 남아 있다. 이 봉수대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강화 본섬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편 하점면에 있는 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되..

충주 탄금대, 가야사람 우륵과 신립장군의 이야기가 담긴 남한강변 명승지

충주는 중앙탑이 충주에 소재하고 있듯이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남한강 물줄기를 통제하고, 조령,죽령을 통한 영남지역과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이다. 탄금대는 남한강 물줄기의 중심인 충주에서도 경치가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나 또한 많은 아픈 사연을 가진 곳이다. 충주 탄금대는 남한강이 충주댐을 지나서 속리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큰 하천인 달천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대문산이라고 부르던 작은 야산을 말하여 남한강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남한강 하류 방향으로는 고구려비, 중앙탑, 장미산성, 누암리고분군 등 삼국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충주시 가금면 지역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가야사람 우륵이 터를 잡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가야금을 타던 장소라 하여 탄금대라고 부른다. ..

강화 석릉(사적 369호), 최충헌 정권에 의해 폐위된 고려 21대 희종의 능

석릉은 고려 21대 희종의 능으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이 능은 조선시대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봉분하였다고 한다. 희종은 신종의 아들로 무신정권 최충헌 집권기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1204년에 즉위하였고, 1208년 당시 내시 왕준명 등과 함께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개성으로 돌아와 살기는 했는데, 복위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교동도로 유배되어 죽었다고 한다. 석릉은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된 국왕의 능이라서 그런지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조성되지 못하고 강화도에서도 깊은 산중에 속하는 양도면 진강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석릉을 찾아가는 길은 양도면 카톨릭대학 인..

강화 곤릉 (사적 371호), 고려 대몽항쟁기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의 능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마을 뒷편에 위치한 곤릉은 고려 강종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고려의 대몽항쟁기의 대부분을 보낸 고종의 어머니로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던 시기에 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에는 곤릉 이외에도 희종의 능인 석릉, 희종의 비 순경태후의 능인 가릉, 고종의 능인 홍릉이 남아 있는데, 홍릉을 제외하고는 강화군 양도면 일대에 고려귀족들의 무덤들과 함께 분포하고 있다. 곤릉의 봉분은 붕괴되어 각종 석물들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고 '고려원덕왕후곤릉'이라고 적혀 있는 표석만 남아 있다. 능앞에는 고려시대 능제의 특징인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해 놓고 있으며, 조선왕릉의 정자각처럼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가 남아 있다. 강화군 양도면 길정..

강화 석수문, 강화산성 서문 부근 동락천에 세운 수문

강화 석수문은 강화산성 서문에서 약간 남쪽편에 위치한 수문이다. 강화 고려산에서 발원하여 강화읍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에 설치했던 작은 수문으로 강화산성을 구성하는 구성요소 중의 하나이다. 병자호란 이후 숙종때 전국적으로 국방시설을 재정비 할때 강화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수문으로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례라고 볼 수 있으며, 전국적으로 토목관련 유적이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중요한 유적지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수문은 이 수문의 3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수문은 잘 다듬은 화강석을 여러단 쌓아 교각으로 만들 그 위에 화강석으로 홍예를 쌓아 올렸다. 구한말에 갑곶나루로 옮겨 돌다리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위치로 70년대에 옮겨져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복원된 부분이 있어서..

달성 현풍 석빙고(보물 673호),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

달성군 현풍면 상리에 위치한 현풍 석빙고이다. 이 석빙고는 현풍현 관아에서 운영하던 것으로 현풍면 동쪽 비슬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현풍천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빙고는 현풍 사직단이 옮겨져 있는 작는 구릉 아래쪽에 남북 방향으로 만들었는데, 출입구는 바람이 통하지 않는 언덕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길이 9m, 너비 5m, 높이 6m의 크지 않은 규모로 영조때인 173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들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는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로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경주 석빙고, 청도 석빙고, 창녕석빙고,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가 있으며, 안동을 제외하고는 공교롭게도 서로 인접한 지역들이다. 서울에는 동빙고동.서빙고동이란 지명으로만 옛 석빙고의 흔적..

보령 대천 한내 돌다리, 대천천을 건너는 조선시대 돌다리

보령시내를 관통해서 흐르는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조선시대 돌다리인 '한내 돌다리'이다.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져 대천천 고수부지 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이 다리는 대천천 이남지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교통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리라고 한다. 폭 2m 정도로 우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조선시대 교통로에서는 중요했던 다리이다. 17세기경에 만들어진 한내 돌다리는 현재는 12칸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긴다리로 추정되고 있다. 큰 화강석을 가공한 장대석으로 받침돌과 상판을 만들었으며, 상당히 교각의 높이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상당히 튼튼해 보이는 다리이다. 장대석으로 교각과 상판을 단순하게 만든 다리로 토목기술적으로는 우수하다고 보기 힘든 평이한 다리이다. 1992년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석재..

한국민속촌, 베를 짜는 무명길쌈

고려시대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이래로 우라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었던 목화로 만든 무명베옷을 짜는 무명길쌈 도구들이 한국민속촌에 전시되어 있다. 무명은 조선시대 여자들이 했던 집안일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 중 하나이다. 길쌈은 국가적으로도 상당히 중요시 여겨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들은 길쌈에 참여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명베는 가족들이 입었던 의복의 재료로도 중요했지만, 국가에 납부해야하는 세금, 물자의 거래를 위한 화폐로서도 중요한 기능을 했던 품목으로 산업혁명이후 서구의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면직물이 들어오기전까지도 그 역할을 잃어버리지 않아서면, 일제강점기 이후까지도 농촌에서는 오랜기간동안 무명길쌈이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시골출신의 나이드신 어른들이 베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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