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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129

물시계, 자격루를 1/2로 축소한 조선시대 물시계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 앞에 전시된 조선시대 물시계이다. 세종때 만들어진 물시계인 자격루 1/2로 축소하여 만든것이라 한다. 이 물시계는 조선 중기 중종때 주조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 구성품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서 그런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덕수궁에 전시된 자격루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작동원리도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물시계는 자격루에 비해서 작고 아담해 보인다. 부표가 설치된 물통이 2개가 있어서 하나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계속 작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물시계에 물을 공급해 주는 뒷편에 있는 큰 물통 큰 물통 앞에는 작은 2개의 물통이 있어서 부표가 설치된 물통에 물을 정밀하게 흘러보내는 역할을 한다. 부표가 설치되어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물통. ..

수표, 청계천 수위를 측량하던 장치 (보물 838호)

서울 청량리 명성황후 홍릉이 있었던 자리에 조성된 영휘원 뒷편으로는 세종대왕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약간을 낡은 분위기를 주고 있는 곳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낮았던 60년대에 세워져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 기념관 건물 앞에는 보물 838호 지정된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던 장치인 수표가 서 있다. 수표는 조선 세종때 강우량을 측정하더 측우기와 함께 기상현상을 측정하던 시설이다. 세종때 만든 수표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촌.푼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수표는 청계천 수표교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성종때 만든 수표를 개량하여 영조때 만들어 설치한 것이라 한다. 청계천 수표교에 설치되어 있던 수표. 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서울 영휘원(사적361호), 고종의 후비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

영희원은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묘소이다. 황귀비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영친왕을 낳았으며, 그녀의 위패는 경복궁 뒷편 칠궁에 모셔져 있다. 황귀비는 양정의숙, 진명여학교를 설립했고, 숙명여학교 설립에 거액을 기부하여 구한말 사학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다. 원래 이곳은 명성황후의 홍릉이 부근에 있었고, 고종도 이 곳에 능을 조성할려고 했던 것 같은데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은 남양주에 위치하고 있다. 영휘원은 영친왕의 장남이자 영휘원 주인인 엄귀부의 장손인 이진의 묘소인 숭인원과 나란히 있고, 아들인 영친왕과 며느리인 이방자여사의 묘는 영원이라하여 남양주 홍릉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고종의 후비이자 구한말에 여러 사학 설립에 기여한 엄귀비의 묘소인 영휘원 능원 입구임을 알..

서울 숭인원 (사적361호), 명성황후 능인 홍릉이 있었던 자리.

서울 청량리 북쪽편에 위치한 숭인원은 원래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의 능이 홍릉이 있었던 자리이다. 1919년 고종이 죽으면서 남양주 금곡동에 고종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이장하였다. 바로 옆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희원이 있는데 이는 고종의 능을 생전이 이 곳에 조성할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릉이 이전되고난 빈자리에 영친왕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가 1922년에 조성되면서 숭인원으로 불리게 된 것 같다. 지금도 이지역이 홍릉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주변에선 도심속의 작은 숲을 이루는 공간과 국가기관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숭인원은 고종의 아들이자 일제강점기에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는 영친왕의 맏아들인 이진의 묘소이다. 아마도 조선시대를 마감하는 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출입..

서울 살곶이다리 (전곶교, 사적160호),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가장 큰 다리

살곶이는 중량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한양대학교 동남쪽편 개울 부근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 살곶이 부근 뚝섬지역에 풀이 많아서 국가에서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고 하며, 기병들의 열병식이 이 곳에서 행하여졌다고 한다. 조선초 태종이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하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과 풍양이궁을 수시로 행차했기대문에 세종이 이 곳에 다리를 놓게 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서울동쪽과 동남쪽지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길이어서, 많은 사람의 민원에 의해서 성종때 이 다리를 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하천을 보면 강폭이 조금 있고, 물도 깊어 보이는데 배로 건너기도, 걸어서 건너기도 애매한 지형을 하고 있어 다리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

서울 정릉, 서삼릉에서 옮겨온 중종의 능

강남 선정릉에 있는 중종대왕의 능인 정릉이다. 원래 중종의 능은 고양 서삼능에 있었으며, 그 당시에는 그 곳을 정릉으로 불렀다가 중종의 능이 이 곳으로 이장하면서 서삼능에는 장경왕후의 능만 남고 이름도 희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는 정능의 이관을 주도했던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문정왕후 자신은 이 곳 정릉에 묻힐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문정왕후는 중종과 자신의 내세를 위해서 원찰로서 봉은사를 보우대사와 함께 크게 일으켰는데, 실제로 문정왕후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서울 동쪽 동구릉 부근의 태릉에 묻혔다. 아마도 당시 중종의 능인 정릉의 이장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 같고, 지금도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과 함께 유일하고 ..

서울 선릉,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성종대왕 능

서울 강남구에 도심 한가운데 공원처럼 존재하고 있는 선정릉은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성종대왕의 능인 선릉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능이 있는 곳이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정현왕후의 능에는 둘레석인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있다. 선릉과 정릉이 있는 이 곳은 강남개발로 급격히 도심화되어 왕릉에 속한 영역의 대부분이 아파트, 빌딩, 주택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 소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수목들이 들어선 도심속의 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강남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조선 성종대왕의 능인 선릉. 성종 재임시 완성한 국조오례의에 충실한 왕릉이라고 한다. 왕릉 입구임을 말해주는 홍살문 홍살문 옆에 왕이나 ..

구한말 풍운아 김옥균 선생 유허

옛 아산현 소재지였던 영인면소재지에는 아산향교, 아산현 동헌 아문이었던 여민루가 옛 관가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곳에는 특이하게도 구한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풍운아였던 김옥균 선생의 묘소가 마을 뒷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일본 동경의 청산외인무덤에 있었던 그의 무덤을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 한다. 김옥균 선생의 무덤은 아산만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동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과 협력하여 개화운동을 했던 까닭에 일제강점기에 그의 양자가 이 곳 아산군수를 지낸 이 곳에 그의 묘소가 있을 수 던 같다. 김옥균 선생은 1894년에 천진에서 수구파 자객에게 암살당한 후 능지처참을 당했다가 갑오경장 이후에 복권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과 실천방법이..

남양주 다산 정약용선생 유적지

남양주 조안면 팔당댐 인근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이다. 이 곳 다산 선생 유적지는 한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다산이 벼슬을 버릭고 낙향해서 살던 집인 여유당과 다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그리고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 다산 유적지는 서울에서 아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어며, 조선후기 정조때 실학사상에 큰 업적을 남긴 선생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다. 다산 유적지 뒷동산에 마련된 선생의 묘소. 지금은 팔당댐으로 막힌 호수같은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 묘소 오르는 길 언덜길에서 보이는 다산 선생의 저택인 여유당 다산 정약용 선생과 부인 풍산 홍씨의 합장묘. 선생의 묘는 소박하면서 단정해 보인다. 묘소 아래로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

파주 자운서원, 율곡 이이 선생 가족묘

자운서원의 원래 건물들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으로 없어졌지만, 전국에 있는 율곡선생을 모신 여러 서원 중에서 자운서원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 이이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자운서원이 자리매김 하고 있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에는 큰 업적을 남긴 수많은 위인들이 있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지폐에 등장하고 있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큰 영향을 지금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율곡 선생의 가족묘는 입신양명을 했다고 해서 율곡선생과 노씨부인은 묘가 제일 윗쪽에 있고, 그 아래로 큰 형, 아버지인 이원수와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합장묘, 그리고 아들 이경림 묘가 나라히 ..

충무궁 묘역 - 어제신도비, 충무공신도비, 이봉상신도비

이충무공 묘소 앞에 자리잡고 있는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었다는 어제신도비입니다. 조선후기에도 임진왜란을 극복한 충무공의 노력이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어 도로입구에는 별도의 이충무공신도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에 자리한 어제신도비 (御製神道碑)입니다.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어 세워진 비라고 합니다. 충무공 묘소 앞에 있는 어제신도비에 적힌 글씨입니다. 최근에 만든 것처럼 아주 깨끗합니다. 어제신도비는 충무공의 공로를 치하하여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어 정조 18년(1794년) 10월 4일에 세워진 비로써 이충무공묘소 아래에 있다. 어제신도비의 글씨는 중국 안진경의 묘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기고 호남의 도백 이형원에게 명하여 돌을 캐내 비로 사용토록한 기록이 정조실록에 보..

충무공 유적 아산 현충사 - 이면공 묘소, 후손 묘소

현충사 경내 충무공이 살았던 옛집 뒷동산 아래에는 충무공께서 가장 사랑했던 셋째 아들 이면공 묘소를 중심으로 많은 후손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면공 묘소는 그 명성에 비해 매우 소박하게 꾸며져 있고 다른 후손들의 묘소는 당시의 지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산 현충사 충무공 옛집 동쪽편 동산에 자리잡고 있는 충무공이 가장 사랑했다는 셋째아들 이면공 묘소입니다.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계단을 설치한 것 같습니다. 실제 묘소는 장식이 거의 없는 아주 평범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충무공께서 말을 달리시던 능선 아래에 있는 이면공 묘소로 가는 길입니다. 안내표지판 충무공이 극진히 사랑했던 셋째아들 이면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명량해전 이후 아산에서 어머..

아산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역

현충사 인근에 위치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입니다. 충무공의 묘소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후 여러 차례의 이장을 거친 후 이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성역화된 묘소답게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입구에는 충무공을 기리는 신도비와 정조대왕이 친히 작성한 신도비도 같이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못도 있습니다. 하지만 충무공 후손이 번창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흔히 말하는 명당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산 현충사 인근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입니다. 충무공의 묘소는 현충사 경내에 있지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관리가 잘되어서인지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역 입구입니다..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 묘역

경기도 광주에서 용인 수지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역입니다. 전국에서도 명당으로 잘 알려진 용인지역에서 묘지들이 많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려말 충신으로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의 높이 평가를 받아서인지 근처에 충렬서원과 함께 상당히 성역화된 곳이라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용인에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있는지 궁금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용인 모현면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입니다. 용인 모현면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있는 언덕입니다. 이 곳은 얼핏 보기에도 명당처럼 보여서 그런지 주위에 많은 무덤들이 언덕에 산재해 있습니다. 정몽주 선생 묘소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묘역입구입니다. 언덕을 오르는 입구에 작은 연못이 자리잡고 있습니..

경주 월성 (반월성),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

경주 월성(반월성)에는 우리가 어릴적 삼국시대 신라의 유물로 착각하고 있었던 조선시대 석빙고가 있습니다. 조선후기 영조때 축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여러 석빙고 중에서 잘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내부는 시원해 보이고 지붕에는 3곳의 환기구가 있습니다. 경주 월성(반월성)에 위치한 석빙고 전경입니다. 많이 보아왔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경주 월성(반월성) 내 석빙고 지붕에 설치된 3개의 환기구입니다. 문이 굳게 잠겨있는 석빙고 출입문입니다.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는 석빙고 내부입니다. 임해전지에 월성(반월성) 내부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석빙고입니다. 경주 월성(반월성) 외부에서 본 석빙고입니다. 멀리 환기구가 보입니..

창녕 석빙고

창녕읍 중심부에 위치한 창녕석빙고는 전국에 산재한 많은 석빙고 중의 하나이다. 이 석빙고는 조선 영조때 창녕 현감이 만들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쓴 비석이 석빙고 앞에 남아 있다. 전국에 있는 많은 석빙고들을 보면 대체로 조선후기 영조 재위시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 얼음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 석빙고. 석빙구 내부는 문이 잠겨 있어 볼 수는 없었다. 이 창녕 석빙고의 제작 내력을 적어 놓은 비석 측면에서 본 석빙고, 위에 여러개의 환기구를 두고 있다. 여러 방향에서 본 창녕 석빙고 창녕군 명덕초등학교 맞은편 도로변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

안동석빙고 (보물) - 안동댐 아래 낙동강변에 위치한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에만 있는 것이 전국 각지에 석빙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곳 안동에 있는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래의 안동석빙고는 지금처럼 언덕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낙동강면에 있었던 것인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구조상 특징적인 면은 많지 않으며 생김새는 경주의 석빙고와 비슷하다. 안동석빙고가 있는 언덕에 오르면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볼 수 있다. 안동 석빙고는 원래 낙동강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옆에 있는 신성현객사와 함께 안동댐 아래 낙동강변 언덕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안동 석빙고는 봉분형태로 만들어진 얼음창고로서 경주 월성의 석빙고와 큰 차이점이 없는 것으..

서울 남산 (목멱산) 봉수대 터 -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던 곳

남산타워, 팔각정과 더불어 서울 남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념물 중의 하나인 목멱산 봉수대 터이다. 예전에 전국의 봉수가 서울로 집결하던 남산의 5개 봉수대 중에 하나가 있던 자리에 현재의 봉수대를 복원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그 많던 봉수대들을 없애버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봉수대는 거의 없는 것 같고, 각지에 복원된 봉수대들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이 수도 서울에서 가져왔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시설이다. 지금도 무선통신망의 중추로서 남산봉수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남산타워가 남산 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남산 정상 목멱산 봉수대터에 자리잡고 있는 봉수대. 불을 피울 수 있는 5개의 봉수로 이루어져 있다. 전국에 복원된 많은 봉수대들 중에 5개의 봉수 전체를 복..

서울 무악산 동봉수대터 - 안산 정상에 자리잡은 봉수대

안산 정상에 자리잡은 무악봉수대는 동.서 봉수대가 설치되어있었다고 하며, 그 중 서봉수대터에는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봉수대터에는 봉수대가 복원되어 설치되어 있다. 동수대는 평안도에서 황해도를 거쳐온 신호를 잡아서 남산 목멱산 봉수대로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던 봉수대였다. 현재는 안산 산책로의 최종 목적지로서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사대문안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쪽편 정면으로는 인왕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한양성곽을 볼 수 있으며,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다. 안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무악산 동봉수대터.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던 자리에 봉수대를 복원해 놓고 있다. 무악산 동봉수대와 서봉수대 사이에는 헬기장이 있고, 건너편에 서봉수대 자리에는 군부대가 있다. 모악산 동부수..

남양주 다산 정약용 생가 - 거리에 전시된 거중기

한강변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 주변에는 다산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로 양평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차로 5분만 들어가면 있습니다. 유적지 앞 도로에는 다산 적약용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이 여러개 복제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수원성을 쌓을때 사용한 거중기인 듯 합니다. 다산유적지 앞 도로에 전시된 거중기입니다. 실물크기로 재현한 복제품입니다. 거중기는 1792년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는 4.4m, 너비는 1.7m이다.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이 기계를 써서 건설 경비를 4만냥이나 절약하였고, 거중기를 이용하여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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