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고려 조선 유적_왕릉 129

관상감관천대(觀象監觀天臺)와 현대 계동 사옥

창경궁 마당에 있는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에 운영하던 관천대 중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관천대입니다. 창경궁 관천대는 국왕이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고, 이 관상감관천대는 관상감 관리들이 천문을 관측하던 곳입니다. 창경궁 관천대와 구분하기 위해서 관상감관천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와 건설을 이끌어 왔던 현대그룹 계동사옥 마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상청 역할을 하던 관상감 자리에 있던 관천대입니다. 관천대의 기능은 관천대 위에 간의를 올려놓고 별을 관측하는 곳으로 첨성대라고도 불립니다.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처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상감관천대는 지금은 현대그룹 계동 사옥 마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 본 관상감관천대입니다. 크게 특징이 있는 유물은 아닙니..

경복궁 풍기대, 조선시대 기상관측 기기

조선시대에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 장치로 풍기를 사용했는데, 이 유물은 풍기를 꽂았던 팔각형 기둥대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경복궁 풍기대에는 풍기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에는 물이 고이지 않게 구멍을 뚫어 배수구를 만들었다. 경복궁에는 교태전 뒤쪽 향원정 가는 길 중간에 풍기대가 설치되어 있다. 경복궁 풍기대는 솥같이 생긴 화강석 대 위에 팔각형 기둥을 세운 단순한 모양으로 제일 위쪽에 깃발을 꽂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단순한 형태이지만 궁궐에서 바람의 세기를 측정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발달된 기상관측 활동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하단부에는 용머리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고, 솥발의 형태를 하고 있다. 구름 문양이 새겨진 팔각기둥 경복궁 풍기대. ☞ 경복궁 풍기대 (보물)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

세종대왕 능 (영릉) 전시물 - 정남일구, 적도의, 관천대

☞ 정남일구 정남일구는 세종19년(1437년)에 제작한 해시계의 하나로 지남침이 없이도 남쪽 방향을 결정하고 동서로 움질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축 끝에 추를 달아 정남일구의 수평을 잡도록 하였다. 지평환에는 24방위와 24절기가 표시되어 있으며, 사유환 양 측면에 눈금이 새겨져 있어 정오에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할 수 있다. 사유환 안쪽에는 직거와 남북방향으로 움직이는 규형이 있어서 일 년 동안의 24절기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루의 시각을 알 수 있다. 시각을 알아보려면 사유환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규형을 남북방향으로 움직여 규형의 남쪽 구멍을 통과한 태양 광선이 시각선과 절기선이 그려져 있는 시반면에 닿을 때 정사각형으로 뚫린 구멍의 중앙에 나타난 시각을 읽으면 된다. ☞ 적도의 조선후기, 남병철은..

세종대왕 능 (영릉) 전시물 - 자격루, 풍기대, 측우기

☞ 자격루 자격루는 조선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 자격루의 작동원리는 파수호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수수통에 고이면 시각의 눈금이 있는 살대가 떠오르면서, 지렛대 원리의 자동조절장치를 움직여 스스로 종과 북과 징을 쳐 시각을 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 자격루는 16세기초 중종때 개량되었으나 지금은 복잡한 자동시보장치가 없어지고 3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만 남아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본떠 제작한 것이다 ☞ 풍기대 풍기대는 바랑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바람 깃발을 세운 풍향기의 대이다. 세종시대에는 농업기상학이 발달하여 기상관측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강우량의 측정과 함께 풍..

세종대왕 능(영릉) 전시물 - 소간의, 천평일구, 현주일구

☞ 소간의(小簡儀) 소간의는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고, 낮과 밤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체관측기기이다. 세종16년(1434년)에 이천, 정초, 정인지가 제작하여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설치하였다. 소간의는 간의보다 크기가 작고 이동이 편리하도록 더욱 간편하게 만든 것으로 눈금이 새겨진 둥근 고리 모양의 환, 즉 사유환, 적도환, 백각환, 규형, 기둥과 밑받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도좌표계와 지평좌표게로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천체관측기기로 해, 달, 오행성과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를 측정할 수 있다. 소간의는 세종시대에 도특하게 창제한 세계 유일의 천체관측기기이나.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복원하였다. ☞ 천평일구 천평일구는 세종19년(1437년)에 창제한 해시계 ..

세종대왕능(영릉) 전시물 - 일성정시의, 일구대, 앙부일구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일성정시의는 조선 세종 19년(1437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천,장영실이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고안하여 낮과 밤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체관측의기이다. 이는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주야겸용의 측시기로 해시계의 원리와 항성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규칙적으로 돈다는 별시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 구조는 십자거,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정극환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세종시대에 모두 4개의 일성정시의가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될 때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일성정시의는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다. ☞ 일구대 일구대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

세종대왕 능(영릉) 전시물 - 혼천의, 규표

☞ 혼천의 혼천의는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천체 위치측정기로서 일월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천체관측기기이다. 혼천의는 오래 전부터 천문관측에 사용하여 왔으나, 문헌사으로는 세종실록에 정초, 박연, 김진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 처음이다. 그 후 개량을 거듭하여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는 시계와 연결하여 혼천시계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이민철, 송이영 등이 이를 개량하여 경희궁에 설치하였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 혼천의는 국보인 송이영의 혼천시계 중 혼천으 부분을 확대 복원한 것이다. ☞ 규표 세종시대에는 많은 천문의기들을 제작하여 하늘의 현상과 별들의 운행을 관측하였다. 규표는 일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 날인가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였던 도..

세종대왕릉(영릉) 전시물 - 혼상, 간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세종 19년(1437년) 경복궁내에 만든 혼상은 오늘날 천구의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이다. 이 둥근 혼상을 회전시키는 축은 지구으 자전축인 북극(북극성 방향)과 남극 방향이 일치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혼상에 그려진 별자리도 시간에 따라 지평환의 동쪽에서 떠오른다. 또한 천체가 남중(자오선을 통과)할 때는 자오환을 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평환 밑으로 지는 모습이 재현되어 하루 밤 동안 별들의 운행을 살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종 때의 혼상은 물의 흘러내리는 힘을 이용하여 자동적으로 하루에 한번씩 회전시킴으로써 하루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같게 하여, 이 혼상을 이용하면 밤의 시간과..

고양 서삼릉 희릉, 외롭게 떨어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원당종마목장 바로 옆에 있는 희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사극 '여인천하'에 나오는 중종과 명종때의 수많은 사건과 정쟁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능이다. 원래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능을 당시 정쟁의 결과로 이 곳 서삼릉으로 옮겼다고 하며 중종의 능도 이 곳에 있었으나, 명종때 문정왕후가 강남의 선정릉으로 능을 옮겼다고 한다. 사극에서 슬픈모습으로 많이 등장하던 장경왕후는 죽어서도 홀로 자리를 하고 있으며, 다만 그 옆쪽에 자신의 아들인 인종은 능인 효릉과 함께 있다는 것이 위안일 것이다. 중종 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중종의 능과 함께 있을때는 정릉이라고 불렸으나, 선정릉으로 이장후에는 희릉으로 불린다. 근처의 자신의 아들인 인종의 능이 있다. 입구의 홍살문. 그 옆에 판위..

고양 서삼릉 예릉, 조선이 마지막으로 조성한 국왕(철종)의 능

고양 서삼릉의 예릉은 조선이 법규에 의해 조성한 마지막 능으로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이다.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기때문에 실질적으로 예법에 맞게 국가에서 시행한 마지막 왕릉이 되었다. 예릉은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주도로 왕권 강화를 보여 주기 위해 석물과 부속 건축물을 웅장하게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속건물로는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 있고, 제례를 준비하던 부속건물인 수라방은 없어지고 수복방은 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다. 조선 왕릉 상당수가 농협을 비롯한 농수산부에 산하 기관에서 접수해서 그런지 주변에 아름다운 길과 목장풍경으로 유명한 원당종마목장과 농협대학을 비롯한 유사 기관들이 모여있다. 조선 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 전경. 홍살문, 정자각, 비각, 능..

고양 서삼릉, 의령원과 효창원

원당 종마목장과 농협대학이 위치한 서삼릉에 있는 의령원과 효창원이다. 효창원을 정조의 아들이 문효세자의 묘소로 원래는 서울 효창공원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의령원은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묘소로 정조대왕의 형님이 되는 분으로 그런 연유로 해서 이 곳으로 효창원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앞쪽에 의령원이 있고, 뒷쪽에 효창원이 있는데 격에는 잘 맞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효창원을 후에 이 곳으로 옮겨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효창원과 의령원 앞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각이 있는데, 능이 아니라서 그런지 정자각 형태를 하고 있지는 않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의소세손의 묘소인 의령원. 어린나이에 죽어서 그런지 영조가 직접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의령원 앞에 있는 석물. 영조가 ..

화성 융건릉, 융릉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합장릉

화성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원래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 곳 화산으로 옮기면서 영우원으로 했다가, 장조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곳 화성 융릉,건릉이 있게 했으며, 수원 화성을 건축하게 된 동기중이 하나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이다. 정조의 정성이 깊었던지 서쪽편 정조대왕의 건릉보다도 사도세자의 융릉이 더 웅장해 보인다. 사도세자의 능인 수원(화성) 화산의 융릉. 원래 조성시에는 세자의 능으로 조성했지만, 왕릉 보다도 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러 방향에서 본 사도세자의 융릉 제사를 올리는 공간이 융릉 정자각 측면에서 본 정자각 정자각 뒷쪽.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대 위 제사를 올리는 공간 융릉 정자각 추녀마루..

화성 융건릉, 정조대왕 건릉 정자각 등 부속 건물들

정조대왕 건릉의 부속건물로는 제를 올리는 정자각, 왕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물, 제물을 준비하던 수라간과 왕의 업적을 적어 놓은 비각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제를 올리는 공간이 있다. 왕릉이 엄숙함을 잘 반영하여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건릉 정자각. 제를 올리는 공간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와 국왕이 다니는 어도의 2개의 길이 있다. 정자각은 한자 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자각이라 부른다. 건릉이 시작하는 부분이 홍살문 제물을 올려놓는 장소인 판위가 홍살문을 지나면 동쪽편에 있다. 제물을 준비는 장소인 수라방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신도와 어도로 구성된 참도가 있다. 정자각은 1단의 월대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로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다. ..

화성 융건릉,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건릉

수원(화성) 화산 융건릉 중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건릉이다. 정조가 사도세자 능인 융릉을 국왕의 격에 맞게 조성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서 화산 동쪽에서 두번째 언덕에 조성했다가 효의왕후 사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효심을 잘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는 왕릉 가까이는 갈 수 없게 되어있고, 아래에서만 올려다 볼 수 있다. 수원 화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정조대왕이 묻힌 건릉 정조대왕 건릉 입구에 홍살물이 보이고, 중앙에 정자각, 뒷편에 봉분이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건릉의 모습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건릉 입구 정조대왕 건릉 봉분 확대해서 본 건릉.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

화성 융건릉 왕릉 들어가는 숲속길과 입구 재실

화성 화산에 위치한 융건릉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과 정조대왕이 묻힌 건릉을 통칭하여 융건릉이라 부른다. 현재는 행정구역상 화성에 속하지만 통칭은 수원 화산이라고 부르며, 근처에 있는 용주사와 더불어 왕릉 영역을 이루고 있다. 화산은 수원 남쪽의 넓은 벌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왕릉을 숲을 아주 정성스럽게 이백년 정도로 가꾸어 왔기때문 숲이 상당히 우거지고 아름답다. 융건릉 입구에서 건릉과 융릉을 한바퀴 돌고 나면, 숲의 기운을 듬뿍받고 나올 수 있다. 융건릉 입구에서 조금 걸어서 들어가면 동쪽 융릉방향과 서쪽 건릉방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만난다. 길 양쪽으로 송림이 우거져 있다. 갈림길에서 서쪽편 건릉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숲은 송림에서 다른 활엽수로 바뀐다. 숲길을 걸어서 조금더 들어가면 정조대왕의 ..

전주 경기전 조경묘(肇慶廟),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를 모신 곳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 부부의 위패를 모신 장소로 전주 경기전 정전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씨왕조의 시조를 모신 장소답게 규모는 크지는 않지만 외삼문, 내삼문이 있고 내부에는 신로(神道)와 향로가 놓여 있는 등 왕실의 법도를 많이 따르고 있으며, 우측편에는 제법 큰 규모의 재실(齋室)이 있습니다. 전주이씨 시조를 모신 곳이라서 그런지 일반인들에게는 내부가 공개되지 않고 외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 입구에 서있는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조경묘의 외삼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서면 조경묘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외삼문이 있습니다. 유교적인 법도에 따라서 삼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신(神)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에는 틈이 많이 있습니다. 조경묘는 ..

연세대 교정에 있는 수경원(綬慶園) 터와 정자각

수경원 옛터에서 남은 건물인 정자각입니다. 예전에는 바닥의 초석과 앙상한 기둥만 남아있고 담장도 없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깨끗하게 복원을 해 놓고 있습니다. 내력은 잘 몰랐는데 이 곳이 정조의 할머니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묘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예전부터 연세대학교회 앞 언덕의 잔듸밭은 봉분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교회가 있는 자리는 봉분이 있던 자리라고합니다. 수경원의 남은 건물은 지금은 복원된 정자각과 비각뿐이라고 합니다. 수경원 옛터에서 남은 건물인 정자각입니다. 격식에 맞게(?) 잡상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바닥의 초석과 앙상한 기둥만 남아있는 폐허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복원을 해 놓고 있습니다. 내력은 잘 몰랐는데 이 곳이 정조의 할머니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

청계천 수표교, 하천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가 있던 다리

서울 장충단 공원 옆을 흐르는 개천에는 옛날 청계천에 있던 돌다리 중의 하나로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가 설치되었던 다리인 수표교가 옮겨져 설치되어 있다. 60년대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청계천 돌다리 중 원형대로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다리인 것으로 생각된다. 청계천 다리는 조선초 태종부터 세종때까지 돌다리로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샘플같은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아치교를 많이 세웠는데 청계천 돌다리는 화강석으로 조립식에 가깝게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데, 아마도 큰비가 왔을 경우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복구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수표교에 설치되어 있던 수표는 이 곳에 같이 있다가 현재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울진 월송정 입구 평해황씨시조단

관동팔경 중 하나인 울진 월송정 송림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평해황씨시조단이다. 이 곳을 찾은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월송정을 찾아가는 길에 넓은 정원이 있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몇동 있길래 차를 멈추고 한번 둘러본 곳이다. 월송정 입구 소나무 숲에 연못을 파고 재실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서 부잣집 저택인 줄 알았는데, 평해황시 시조를 모시는 곳이라 한다. 평해황씨 시조는 후한의 학사로 풍랑을 만나 표루하다가 평해지역으로 흘러들어 신라에 귀하한 황학이라는 사람으로 현재 건물들과 비석들은 조선 숙종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시조단으로 문중에서 신성시 여기는 장소로 그런지 일반인이 출입을 할 수 없고 담벼락 밖에서만 내부를 살펴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월송정 입구 울창한 송림속에 위치한 평해황씨시조단 부속..

영은문 주초, 중국 사신을 맞던 모화관 앞에 세웟던 영은문 주춧돌

조선시대 중국사신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의주를 거쳐서 오랜 여행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고양 벽제관에서 잠시 머물면서 의복을 단정히 하고, 한양의 서북쪽 경계였던 무악재를 넘으며, 첫번째로 보이는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영은문을 지나서 숙소인 모화관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구한말 자주독립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며 주춧돌만 남아 있다. 구한말이라 영은문을 찍은 사진은 여러장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보면 한국식과 중국식을 혼합한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독립문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독립문과 영은문이 있던 원래 자리는 도심쪽인 영천시장 부근이라 하며, 도로공사로 인해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날 영은문 사진을 보면 영은문은 중국 패루와 비슷한 모양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