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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곶이는 중량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한양대학교 동남쪽편 개울 부근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 살곶이 부근 뚝섬지역에 풀이 많아서 국가에서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고 하며, 기병들의 열병식이 이 곳에서 행하여졌다고 한다. 조선초 태종이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하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과 풍양이궁을 수시로 행차했기대문에 세종이 이 곳에 다리를 놓게 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서울동쪽과 동남쪽지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길이어서, 많은 사람의 민원에 의해서 성종때 이 다리를 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하천을 보면 강폭이 조금 있고, 물도 깊어 보이는데 배로 건너기도, 걸어서 건너기도 애매한 지형을 하고 있어 다리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살곶이다리는 한양대학교에서 성수동을 연결해 주는 돌다리로 조선전기 성종때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송파나루나, 광나루를 통해서 한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한양으로 들어갈 때 많이 사용하는 다리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중 다리 중 가장 큰 다리로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현재 살곶이다리의 위치는 원래의 위치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서울이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하천폭이 많이 넓고 깊어져서 옛날 다리는 한쪽끝에만 남아 있다. 예전에는 다리가 필요한 부분이 현재 돌다리가 남아 있는 부분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살곶이다리는 네모난 돌기동을 가로 4열, 세로 16열로 총 64개를 세워서 만든 다리이다. 다리 높이는 약 3m (10척)이고, 돌기둥의 높이는 1.2m(4척)정도라고 한다.


살곶이다리 교각


살곶이다리는 가로로 4개의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장대석 3개를 올려 놓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서 상판을 받치게 하고 있다.


살곶이 다리 아래에서 본 기둥, 장대석, 귀틀돌


아래에서 본 살곶이 다리 상판돌


위에서 본 살곶이다리 상판돌. 다리는 우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편편하다.

 

살곶이다리는 사적으로 지정된 다리이지만 지금도 사람의 왕래가 가능한 다리이다.


중량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지점을 살곶이라고 부르며, 건너편에 말목장과 낙천정, 풍양이궁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이 산업화되면서 주거지역으로 변하기 이전에는 뚝섬지역은 대표적인 서울의 유원지였고, 경마장도 이 곳에 있었다.


살곶이다리


중량천변 시민공원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살곶이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1920년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 가서 70년대에 다시 고쳐 지었으나,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콘크리트를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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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 살곶이다리 사적제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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