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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충주 탄금대, 가야사람 우륵과 신립장군의 이야기가 담긴 남한강변 명승지

younghwan 2011. 11. 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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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는 중앙탑이 충주에 소재하고 있듯이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남한강 물줄기를 통제하고, 조령,죽령을 통한 영남지역과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이다. 탄금대는 남한강 물줄기의 중심인 충주에서도 경치가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나 또한 많은 아픈 사연을 가진 곳이다.

 충주 탄금대는 남한강이 충주댐을 지나서 속리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큰 하천인 달천과 만나는 지점에 있는 대문산이라고 부르던 작은 야산을 말하여 남한강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남한강 하류 방향으로는 고구려비, 중앙탑, 장미산성, 누암리고분군 등 삼국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충주시 가금면 지역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가야사람 우륵이 터를 잡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가야금을 타던 장소라 하여 탄금대라고 부른다. 또한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일본군을 이 곳에서 일본군의 맞이하여 최대의 패배를 당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말끔히 단장되어 충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도시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충주 탄금대 공원 입구에서 경치가 좋은 남한강변 언덕으로 걸어서 들어가는 길. 소나무를 비롯하여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탄금대 공원 중앙에 세워져 있는 충혼탑. 주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립장군을 비롯하여 병사들을 기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충혼탑 앞에는 신립 장군을 비롯한 병사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탄금대 공원 가운데 위치한 휴식공간.


숲속길 중간에 볼 수 있는 조각상


탄금정 정자 아래에 있는 열두대라 불리는 절벽이다. 신립장군이 왜군과 싸울 때 열두번을 오르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다는 곳이다. 사실 이 곳에서의 전투는 왜군에 일방적으로 당했던 임진왜란 당시에 있었던 가장 큰 패전 중의 하나로, 병사들이 훈련되지 못하여 조령 고갯길을 지키지 못하고 무모하게 강을 등에 지고 싸우는 배수진을 이곳에 폈다.


열두대 위쫏에 있는 작은 정자인 탄금정. 원래 이곳에 정자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정자에 올라 보는 남한강 풍경이 수려하다.


지금은 충주댐 하류쪽 가금면 부근에 조정지댐이 있어서 남한강 수량이 꽤 많은 것처럼 보인다. 이 곳은 충북내륙을 흐르는 지천인 달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탄금정에서 본 남한강 상류 방향


남한강 남쪽의 충주. 도심과 충주댐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탄금정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열두대


탄금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하류방향. 충주 중앙탑을 비롯해서 장미산성, 고구려비, 누암리고분군 등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한강유역을 쟁탈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던 곳이다. 탄금대의 주인공이 우륵 또한 진흥왕이 이 곳을 점령한 후 그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주시킨 신라 귀족 집단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원 중앙에 위치한 탄금대기 비석. 이 곳이 탄금대임을 기념하기 위해 이 곳 사람들이 1950년대에 세운 것이라 한다.



지금에 와서 공원으로 말끔히 단장된 탄금대는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신라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켜면서 망국의 한을 달랜 곳이자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순국의 현장이며, 현대로 넘어와서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숨져간넋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장중한 남한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칠금동 대문산 기슭의 탄금대. 1,400년 전인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우륵이라는 악사는 조국의 멸망 후에 이 곳에 강제로 이주당한 수 많은 가야인들 중 한사람이었다. 당시 우륵은 탄금대 절벽바위를 주거지로삼고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야금을  타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 들어 사 람들이 하나둘 모여 부락을 이루고 그곳을 탄금대라 명명했다. 탄금공원 산책로 신립장군 순절비 조선조로 넘어와서 임진왜란을 맞아 탄금대는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격전지로 변모한다. 신립장군의 가슴아픈 패전이 이곳에서 기록된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5만명의 왜군이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가자 신립장군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방면을 지키게 된다. 신립장군은 지형을 정찰한 뒤 조령에진지를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우리 군사들의 훈련이 부족해 사지에 몰아넣지 않으면 투지를 드높일수 없다 라고 판단, 28일 새벽 8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추의 한을 품고 남한강에 투신자살, 패장의 불명예를 쓰고 만다.  탄금정 정자에서 북쪽으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열두대라는 층암절벽이기다린다.  왜군과의 격전 당시 장군이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해서 열두대라는 것이다. <출처: 충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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