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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통일신라 불교 화엄종(華嚴宗), 화엄십찰

younghwan 2021. 6. 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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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엄종은 의상(義湘, 625-702년)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 2대조사인 지엄(智俨, 602- 668년)에게 화엄종을 배운 후 670년 귀국하여 676년 왕명을 받아 봉황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면서 해동화엄종을 열었다. 화엄종은 <화엄경>을 근본경전으로 심원하교 광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확립하였는데 천태종과 함께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교학이다. 의상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오진(悟眞) , 지통(智通), 표훈(表訓) 등 10명을 화엄십성(華嚴十聖)이라 한다. 화엄종은 통일신라말까지 뛰어난 승려들을 배출하여 통일신라 불교의 주류로 자리잡았으며 선종이 주류로 등장한 고려시대에도 그 세력을 잃지 않았다. 

<화엄사 화엄석경(보물 1040호)>

의상은 670년 귀국하여 양양 낙산사 관음굴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의상이 머물렀다는 관음굴로 알려진 낙산사 홍련암(紅蓮庵)은 해안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이라 전해진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의상대>
<의상대사 영정을 모심 부석사 조사당(국보 19호)
<부석사 창건설화가 있는 부석바위>

화엄십찰(華嚴十刹)

화엄십찰(華嚴十刹)은 삼국시대 신라 화엄종을 대표하는 10개 사찰을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6개의 사찰이 기록되어 있는데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婆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동래 범어사(梵魚寺), 비슬 옥천사(玉泉寺), 남원 화엄사(華嚴寺)가 이에 해당하며 통일신라말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는 중악공산의 미리사((美理寺), 웅주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전주 국신사(國信寺), 한주 청담사(靑潭寺)가 추가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 사찰은 남아 있지 않지만 대부분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고 있다. 화엄십찰외 주요 사찰로는 의상과 관련된 양양 낙산사, 서산 부석사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 화엄종 사찰로 연산 개태사(開泰寺), 개성 귀법사(歸法寺),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합천 반야사(般若寺) 등이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

영주 부석사(浮石寺)

영주 부석사(浮石寺)는 백두대간 태백산 끝자락 봉황산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이 통일되던 676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봉황산 중턱에 거대한 돌로 석축을 쌓아서 터를 조성하였으며 그 위에 건물들을 올려 놓았다. 주불전인 무량수전과 그 앞 안양루에 올라서면 아래에서 보이는 편안한 모습은 풍경과는 달리 상당히 웅장하면서도 날아갈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통일신라 때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와는 달리 무량수전 동쪽편 언덕에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으며, 무량수전에 모셔진 불상도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화엄종 사찰의 공간배치의 모범이 되었던 곳으로 후대 사찰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는 천왕문에서 시작해서 9단(혹은 10단)으로 석축을 쌓아 가람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찰 가람배치에 불교 사상을 구현하기 위함이라 한다. 삼층석탑과 종무소가 있는 공간을 오르는 3단계 석축이 있고, 범종루을 오르는 3단계 석축, 안양루를 오르는 3단계 석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뛰어난 불국사 석축과는 달리 자연석을 쌓아서 만든 석축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웅장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석사 범종루>

부석사의 중심 영역은 10번째 축대로 조성된 영역으로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 주불전을 자리잡고 있다. 그 앞에는 석등이 놓여 있으며, 삼층석탑은 동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누각 건물인 안양루가 자리잡고 있다. 안양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백두대간 산자락이 이어지는 풍경은 손곱히는 명장면 중의 하나이다. 

<부석사 안양루>
<안양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안양루를 지나면 보이는 장면. 부석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무량수전(국보 18호)와 석등(국보 17호)를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전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이다. 배흘림 기둥을 사용한 주심포계 건물로 상당히 간결하고 안정감 있게 보이는 건축물이다.

<부석사 석등(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

무량수전 동쪽편에 세워진 삼층석탑(보물 249호)은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던 경주의 쌍탑식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고, 불전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249호)>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구례 화엄사(華嚴寺, 사적 505호, 명승 64호)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 중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창건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있으나,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발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때 황룡사 승려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화엄사상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며, 도선국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각황전(국보 67호),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35호)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지리산의 유서깊은 사찰이다.

<구례 화엄사(사적 505호)>

화엄사는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높은 곳에 불전이, 아래쪽에는 수행공간인 요사채와 강당이 배치된 전형적인 산지사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대웅전과 강당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이 배치된 동서축이 직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각황전(국보 12호)은 현존하는 옛 불전 건물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옛 장륙전의 형태를 계승하고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일반 사찰의 주불전과는 달리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비로자나여래를 모신 대적광전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옛 장륙전에는 통일신라말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보물 1040호)이 벽에 있었는데 지금도 석경이 일부가 남아 있다.

 <각황전(覺皇殿, 국보 67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국보 12호)은 높이 6.4m로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전체적으로 8각을 기본으로, 3단의 받침돌 위에 화사석, 지붕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전형적이 석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삼국시대 금당인 장륙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각황전의 규모에 걸맞는 석등이다.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화엄사 대웅전(보물299호)은 조선 인조 때 벽암대사가 화엄사를 중건할 때 세운 불전으로 이 사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은 석가여래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에서는 화엄십찰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비로자나여래를 모시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가람배치로 볼 때 각황전 자리에 있던 장륙전에 비로자나여래가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화엄사 대웅전(보물 299호)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보물 132호, 133호)>

각황전 뒷편 언덕에 위치한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35호)은 2층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은 삼층석탑이다. 2층 기단에 4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35호)>

원통전 앞에 세워져 있는 사자탑(보물 300호)은 네마리의 사자가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1층 기단은 네모난 돌을, 2층 기단은 4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을 얕은 부조로 새겨 놓았다.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300호)>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사적 504호)는 팔만대장경판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로 불리며 송광사, 통도사와 더불어 전국 3대 사찰로 손꼽히는 곳이다. 해인사는 9세기에 당나라를 유학한 순응과 이정 두 승려가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를 건국할 때 큰 공을 세워 화엄사상을 크게 떨쳤다고 하며, 통일신라 말 혼란기에 희생된 승려와 주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세운 길상탑이 해인사 입구에 있다.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조선초 강화 선원사에 있던 고려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오면서 법보사찰이 되었다.

<가야산 해인사>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있는 공간은 비로탑으로 불리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양쪽에 요사채가 있다. 마당보다 높게 축대를 쌓아 조성한 공간에는 주불전인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비로전, 응진전, 명부전 같은 불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바깥쪽으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크고 작은 요사채들이 자리잡고 있다. 

<주불전이 있는 공간>

비로전 뒷편에 독성각이 있으며 그 옆에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은거했다는 학성대가 옆에 있어 의미가 있는 듯 하다.

<해인사 독성각>
<독성각 옆 학사대>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 333호)은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동한 희랑대사(希郞大師)의 모습을 조각한 상(像)으로 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려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祖師像)으로 사찰 조사당에 모시기 위해 제작되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사찰에서는 승려의 모습을 조각한 조각상을 새기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한국에서는 승려의 초상화를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조각상은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고승의 조각상이다.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 333호)>

장경판전(국보 52호)은 고려 팔만대장경(국보 32호)를 비롯한 불경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전각으로 해인사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장경판전은 해인사에 가장 오래된 건물로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세조 때 크게 다시 지었으며, 성종 때 다시 중건한 건물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인사 경내 여러 전각들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경판전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오늘날까지 팔만대장경을 지켜오고 있다.

<법보공간을 들어가는 작은 협문>
<해인사 장경판전 수다라전>
<연꽃모양을 하고 있는 수다라전 출입문>
<수다라전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 목판(국보 32호)>

동래 범어사(梵魚寺)

부산시 금정산 중턱에 위치한 범어사(梵魚寺)는 왜(倭)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전형적인 호국사찰이다. 고려시대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때 묘전화상을 비롯한 여러 고승들이 크게 중건하였다. 숙종 때에는 금정산에 큰 산성을 축조되면서 성곽의 유지.보수와 방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범어사는 화엄십찰에서 볼 수 있는 산중사찰의 가람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내 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434호), 3층석탑(보물 250호), 일주문(보물 1461호)가 있다.

<동래 범어사>
<범어사 조계문(보물 1461호)>
<범어사 대웅전(보물 434호)>
<범어사 삼층석탑(보물 250호)>

계룡산 갑사(甲寺)

계룡산 갑사(甲寺)는 삼국시대 백제 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절의 크게 중건하면 해인사, 화엄사, 부석사, 범어사 등과 함께 화엄십찰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갑사의 내력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많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이 곳에서 출가한 영규대사가 의병장 조헌과 함께 큰 역할을 하여 국가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아서 오늘날 갑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갑사에는 삼신불괘불탱(국보 298호), 철당간 및 당간지주(보물256호), 승탑(보물 257호), 동종(보물 478호), 석가여래삼세불도(보물 1651호) 등 전각 이외에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계룡산 갑사>

갑사의 중심영역은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당 양쪽에 요사채들을 두고 있다. 대웅전 뒷편 옆쪽 둔 삼성각 외 중심영역에는 불전을 두고 있지 않다. 반면에 승방에 해당하는 대적선원을 비롯하여 요사채들은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대웅전은 개울 서쪽편 대적전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 공간이 좁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갑사 대웅전(보물 2120호)>
<갑사 대적전. 원래 주불전이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진 불전이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철당간과 당간지주(보물 256호)이다. 원래 갑사 중심불전이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자리잡고 있어 원래 사찰의 위치를 말해주는 유물이다. 청주 도심부에 위치한 철당간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철당간이다. 

<갑사 철당간과 당간지주(보물 256호)>

서산 가야협 (普願寺)

보원사(普願寺)는 그 내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절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84호)이 있으며, 절터에서 6세기 중엽에 제작된 금동불상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백제때부터 있었던 사찰로 여겨진다. 통일신라때는 최치원이 언급한 의상대사를 계승한 화엄십찰 중 하나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절터에는 오층석탑(보물 104호), 법인국사탑(보물 105호) 등이 있으며, 절터에서 출토된 거대한 철조불상이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절터>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104호)은 고려초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9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석탑이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사자상을, 윗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새겨놓고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게 만들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 받침이 남아 있으며, 탑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철로 만들 찰주가 높이 솟아 있다.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백제 석탑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104호)>

보원사지(사적 316호) 절터에서 출토된 철조여래좌상이다. 쇠로 만든 불상으로 고려초인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두 손은 없어졌지만 손목의 형태 등으로 볼 때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보인다. 몸에 비해 큰 머리, 부자연스러운 옷주름 등 투박하면서, 호족세력의 힘을 과시하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보원사지 출토 철조여래좌상>

보원사지 절터에 있는 법인국사탑(보물 105호)과 탑비(보물 106호)이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북한산 장의사에서 불경 등을 배웠으며, 고려 광종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 때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법인국사탑(보물 105호)과 탑비(보물 106호)>

서산 부석사(浮石寺)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는 창건했다고 전하며 사찰의 이름도 같다. 의상대사와 부석바위에 얽힌 전설 또한 서로 비슷하다. 이는 부석사가 있는 서산 천수만과 태안반도 일대가 중국과의 해상교류 창구였기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 무학대사가 크게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려때 이곳에 조성된 금동관음보살상이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볼 때 그 이전에도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 부석사>
<부석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연기 개태사(開泰寺)

개태사(開泰寺)는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사찰로 936년(태조19)에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에게 항복받은 황산에 개태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하였다. 개태사는 초기에는 태조왕건의 영정이 봉안되고 주요 제사를 주관하는 등 중요한 사찰이었으나, 고려 수도인 개경과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조금씩 쇠퇴하였다. 조선 전기 세종대에 잠시 중흥기를 가졌지만 그 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논산 개태사>
<개태사 법당>
<개태사 오층석탑>

개태사 철확은 옛 개태사의 규모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유물로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개태사에서 유명한 유물이었던 것 같다.

<개태사 철확>

중국의 화엄종

화엄종은 <화엄경(華嚴經)>을 주 경전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다. 중국 화엄종은 장안 화엄사에서 시조은 두순(杜順, 557-640년)이 열었으며 2대 조사인 지엄(智儼, 602년 ~ 668년)이 기틀을 다졌으며 법장(法藏: 643-712)이 교리를 완성하여 이를 화엄교학이라 한다. 화엄교학은 불교의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였으며 실천적인 측면에서 부족하여 중국과 일본에서는 크게 번창하지 못한 반면 한반도에서는 의상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때 크게 번창했으며 이후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안 천복사>

시안 천복사(荐福寺)

천복사는 당고종 사후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측천무후가 수양제 저택이 있었던 터에 헌복사(献福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다. 706년 불경을 번역하는 번경원(翻經院)이 설치되었으며 소안탑이 건립되었다. 712년 화엄종 3조인 승려 법장이 천복사에서 입적하면서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당현종 때는 중국에 밀교를 전한 승려 금강지(金剛智)가 머물며 밀교경전을 번역하였다. 당무종의 회창폐불(845년) 때 대자은사, 서명사, 대장엄사화 함께 폐사를 면한 중요한 사찰이었다. 

<천복사 소안탑(小雁塔>

천복사 신앙공간은 소안탑 앞쪽에 배치되어 있는 산문(山門), 천왕전(天王殿), 자씨각(慈氏各), 대웅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자씨각 앞에는 종루와 고루가, 대웅보전 앞에는 동소정(東小亭), 서소정(西小亭)이, 마당 양쪽에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주요 전각들은 대부분 청나라 떄 중건한 것으로 벽돌과 목조건축 양식이 혼재된 전형적인 청나라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루와 종루 사이 마당에 남아 있는 수령 1,000년이 넘은 고목들>
<대웅보전 앞 마당>
<대웅보전>
<대웅보전 앞 마당에 세워진 비석들>
<천복사 가람배치>

종루에는 금나라 때(1192년) 때 만든 높이 3.35 m의 철종이 있었다. 소안탑과 함께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를 안탑신종(雁塔晨鐘)이라 하여 관중팔경 중 하나로 손꼽이는 명승이었다. 

<종루 옆 마당에 있는 금나라 철종(복제품)>

대웅보전 뒷편에는 이곳에 당나라 장안에서 3번째로 큰 규모의 번경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각인 장경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위로 승려들이 머물면서 수행했던 승방의 모습이 남아 있다. 장경루를 배경으로 소안탑의 웅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천복사 장경루와 소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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