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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통일신라 때 국가기관인 성전(成典)이 설치되었던 사찰

younghwan 2022. 5. 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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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成典)은 통일신라 때 왕실을 후원을 받았던 사찰에 설치된 관청이다. 칠처가람이었던 사천왕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와 봉은사, 봉덕사, 봉성사, 감은사, 영창궁이 성전이 설치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각 사찰에 성전이 설치되었던 내력과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영창궁성전 ( 677년 (음) )
영창궁성전(永昌宮成典)은 문무왕(文武王) 17년(677년)에 두었다.
(삼국사기 권 제38 잡지 제7 직관 영창궁 성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사천왕사(四天王寺)는 낭산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칠처가람 중 하나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처음 지은 사찰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가 위치한 곳은 경주에서 울산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다고 하며,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입구를 지키던 천왕들로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수미산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예언이 실현시켜준 사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사천왕사는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천왕사 목탑 기단부를 장식하고 있던 녹유사천왕상>

영묘사(靈廟寺)는 신라 칠처가람 중 사천미(沙川尾)에 세워진 사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 이절에서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유명한 예술가인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토유물 중 도깨비얼굴기와에서 화려한 조각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를 대표하는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이곳에서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국보)을 이곳에 옮겨 왔었다고 전한다.

<얼굴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경북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은 삼국시대 경주 칠처가람 중 삼천기(三川岐) 영흥사(永興寺)가 있던 곳이다. 영흥사는 신라 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년 ~ 540년)의 부인 보도부인이 건립한 사찰로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흥사는 경주 남천(문천), 서천(인천), 충효천(모량천) 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있어 삼천기(三川岐)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되는데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영흥사지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공업고등학교>

황룡사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신라인이 신성시여겼던 7곳의 숲에 세워진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궁궐이었더 동궁(임해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21세가 되던해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지을려고 하다고 사찰로 고쳐지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진평왕대에 금당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들과 금당에 모셔진 삼륙존상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여왕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9층목탑을 세웠으며, 이후에 종루와 경루가 세워졌다고 한다.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처음 조성되기 시작하여 9층목탑이 세워짐으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호국사찰로서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황룡사에는 자장, 원효 등의 승려들이 강당에서 설법을 전파했으며,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모형.>

영창궁(永昌宮)은 진평왕 때 창건된 월성 북쪽 별궁에 궁궐내 왕실사원으로 문무왕때 성전이 설치되었다. 성동동 전랑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지신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설치힌 신궁(神宮)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경주 성동동 전랑지(사적), 영창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별궁터>

봉덕사(奉德寺)는 성덕왕 때(706년) 흉년을 구제하고 무열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봉덕사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봉안되었는데 조선시대에 큰 홍수로 북천 둑이 무너지면서 수몰되어 없어졌다. 

<성덕대왕 신종(국보), 봉덕사에 봉안되어 있었다>

봉은사(奉恩寺)는 원성왕 때(794년)에 창건된 사찰로 무열왕계열의 시조로 여겨지는 진지왕릉을 지키는 원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슷한 위치에 애공사, 영경사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절터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진흥왕릉 아래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가 있다. 

<서악동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 절터>

봉성사(奉聖寺)는 신문왕 때(685년) 창건되었으며 이후 경덕왕 때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밀교를 이끌었던 혜통(惠通)이 창건에 관여했던 사찰로 나원리 삼층석탑(국보)이 남아 있는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국보)과 절터>

감은사 절터는 불국사에서 토함산 고개를 넘어 동해안으로 한참을 달리면 해안가 농지가 있는 벌판 언덕에 두개의 거대한 탑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문무왕릉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문무왕이 왜(倭)의 침입을 막고자 감은사를 창건했으며, 그의 아들 신문왕 때(682년) 완성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와 함께 문무왕을 명복을 빌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願刹)의 성격을 갖고 있다. 감은사는 국가기관인 성전이 설치되었다.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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