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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불교 석굴사원(石窟寺院)

younghwan 2021. 7. 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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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사원(石窟寺院)은 바위 굴을 뚫고 공간을 조성한 사원으로 다양한 종교에서 석굴사원을 조성했다. 불교에서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었다. 원래는 더운 지방에서 습기와 벌레 등을 피해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아파트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다. 주로 큰 마을 부근이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다. 이후 불상을 모시고 벽면에 부조나 벽화를 장식하면서 장엄한 분위기가 강조되는 신성한 공간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석굴사원은 용문석굴, 운강석굴 등이 조성되었던 남북조시대 중국을 통해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 불교사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산 용현리 마애석불과 태안 마애석불이 초기 백제의 석굴사원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석굴암 석굴은 세계 석굴사원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석굴사원을 대표하는 유적인 석굴암 석굴(국보)>
<많은 석굴들이 모여 있는 중국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석굴사원은 건축방식에 따라 천연동굴을 이용한 자연석굴, 바위에 굴을 뚫어 조성한 굴착석굴, 큰 벽돌 형태의 돌을 쌓아서 만든 축조석굴이 있다. 자연석굴로는 초기 인도 승려들이 수행처로 삼은 인도 영축산 일대 가섭굴 등이 유명하며 우리나라에도 천성산 석굴, 설악산 계조암 석굴 등이 있다. 바위에 굴을 뚫어 조성한 형태로 인도 바라바르석굴, 아잔타 석굴, 중국 둔황, 룽먼, 윈강 석굴을 비롯하여 석굴사원을 대표하는 유적들이 대부분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군위 삼존석굴이 대표적이다. 가공한 석재로 인공적으로 건축한 축조석굴로는 석굴암 석굴이 대표적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한 설악산 계조암 석굴>
<바위를 뚫어 조성한 군위 삼존석굴(국보)>

마애석불(磨崖石佛)

마애석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으로 7세기 전반 백제에서 시작되었다. 백제의 마애석불로는 서산 용현리 마애석불(국보)와 태안 마애석불(국보)가 잘 알려져 있다. 2곳의 마애석불은 중국 룽먼석굴로 대표되는 남북조시대 중국 석굴사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산동성을 거쳐 백제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국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마애석불이 조성되었으며 초기 석굴사원의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여래상(국보)은 백제인들이 가야산 계곡 바위에 조각한 불상으로 여래입상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을 세워 놓고 있다. 삼존불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북조 말기에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가야산 일대는 중국과 뱃길이 있었던 태안반도에서 부여와 공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불상 앞에는 목조건축물을 세운 흔적이 남아 있어 초기 석굴사원 형식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목조건축물이 있었던 흔적>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국보)은 마애불상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 사각형의 감실안에 보살상이 가운데 있고, 양쪽에 여래상이 있는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불상 아래쪽에는 백제시대 연화대좌가 확인되었다. 불상의 얼굴이 훼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풍부한 양감을 입체감이 돋보이며, 조각수법도 뛰어난 불상이다.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여래입상(국보)>

산동성 칭저우시 출토된 불상이다. 북위 정광6년(525) 가지연(贾知渊)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기록된 삼존불상이다. 광배가 있는 삼존상으로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입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광배 주위에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산동지방과 백제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중국 산동지방 마애여래삼존입상, 산동성박물관>

경북 봉화군 북지리 절터에 남아 있는 마애여래좌상(국보)이다. 이 불상은 자연암벽을 파서 석굴사원 형태의 공간을 만들고, 높이 4.3 m의 거대한 불상을 조각해 놓았다. 얼굴을 형태나 신체의 표현 등을 고려해 볼 때 주변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등과 비슷한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남한강 수로와 죽령 고개를 이용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제를 거치지 않고 당나라에서 통일신라로 직접 전래된 형식의 석굴사원이라 할 수 있다. 중국 낙양의 룽먼석굴 사원 불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은 7세기 초에 조성된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이다. 거대한 자연암석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 석굴사원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석산은 경주와 청도군을 연결하는 20번 국도가 지나가며, 북쪽편에는 선덕여왕이 백제군을 물쳤다는 여근곡(女根谷) 전설이 전해오는 오봉산(해발 634m) 부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 백제군의 침입이 예상되는 주요 교통로였던 곳이다. 중국 산동지방 북제의 영향을 받은 서산과 태안의 백제 삼존불상과 석굴사원이 신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석굴사원이 있는 경주 단석산>
<외부에서 본 석굴사원>

석굴 내부 바위에는 10구의 부처와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인 미륵보살(여래입상)이 북쪽면에 새겨져 있으며, 동쪽에는 관음보살, 남쪽에는 지장보살을 새겨 삼존불을 이루고 있다. 지장보살이 새겨진 남쪽면에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과 삼장보살상 2구를 조각하였다.’는 400여 자의 글자가 새겨 있어 이곳에 신선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북쪽 암벽에 새겨진 주존불은 높이 8.2m의 거대한 불상이다. 외형상 여래입상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바위에 새겨진 글씨에는 미륵보살을 새겼다고 한다. 당시 많이 조성되었던 미륵장륙존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주존불>

주존불 왼쪽편 암벽에는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있는 삼존불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주존불을 안내하고 있는 듯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아래에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공양상 2구와 승려를 새겨 놓고 있다.

<삼존불상>

동쪽벽에 새겨진 보살입상은 주존불에 비해 얕게 새겨 놓고 있다. 오른손 몸앞에 보병(寶甁)을 쥐고 있어 관음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동쪽벽에 새겨진 불상>

남쪽벽에 새겨진 보살입상. 특별한 설명이 없으나 이곳에서는 지장보살으로 보고 있다. 옆에 신선사를 조성한 내력을 적은 400여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남쪽벽에 새겨진 불상>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은 제2석굴암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팔공산 자락 절벽에 동굴을 만들고 불상을 모신 석굴사원이다. 불국사 석굴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바위에 마애불상을 새기고 그 앞에  전실을 두었던 삼국시대에 비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들은 700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석굴이 있는 절터>

본존물은 대좌위에 앉아 있는 자세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으며 삼국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미소띤 얼굴 대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좌.우의 보살은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을 들고 있는데 당나라 불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 석굴(국보)>
<정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경주 골굴암(骨窟庵)

골굴암은 삼국시대 선덕왕 때 인도에서 온 승려 광유가 기림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석불군과 함께 인도와 서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초기 석굴사원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골굴암은 함월산 자락 응회암 절벽에 크고 작은 12개의 석굴에 불전 등을 조성해 놓고 있다.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마애여래좌상(보물)이 주불전이라 할 수 있으며, 약사굴, 관음굴, 지장굴, 산신굴, 나한굴 등 크고 작은 석굴들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후기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도」에는 석굴 앞에 목조 전실이 표현되어 있다. 

<경주 골굴암>
<골굴암의 크고 작은 석굴들>
<석굴들을 연결하는 통로>
<석굴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주불전이라 할 수 있는 마애여래좌상(보물)은 석굴 중 가장 윗부분 바위에 새겨놓은 마애불상이다. 자연석의 석질이 고르지 않이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입체감이 돋보인다. 경재 정선의 그림에서는 목조전실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여래좌상>
<약사여래가 모셔지 약사굴>
<나한굴>

골굴암 석굴 중 관음굴에는 전실이 마련되어 있다. 바위에 굴을 뚫어 공간을 조성하고 그 앞에 전실을 마련한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실이 있는 관음굴>
<지장굴>
<신중단>
<칠성단>
<지금은 비어 있는 석굴>

경주 석굴암(石窟庵)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있는 석굴암 석굴(국보)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 석굴의 구조는 앞쪽은 전실은 사각형을,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은 원형을 하고 있다. 이는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주실에는 그 존재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천부상.보살상.나한상이, 전실에는 인왕상(금강역사)과 팔부중상이, 복도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경주 석굴암>
<석굴암 전실>
<석굴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석굴암은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하여 만든 것이다. 이런 형식은 한대(漢代) 이후 중국과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만든 돌방무덤과 비슷한 형태이다. 이를 석굴사원에 응용한 점에서 독창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석굴사원에는 부처의 일생이나 설법내용을 그린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석굴암 석굴에는 화강석을 조각해서 만든 본존불을 비롯하여 많은 조각상들로 석굴 내부가 채워져 있다.

<석굴암 공간배치>
<석굴암 내부>

석굴암 석굴 내부. 앞쪽 전실 벽면에는 팔부중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복도 입구에는 인왕상이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을 지키고 있다. 석굴암 주실 입구 좌.우에는 범천상과 제석천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범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믿어졌던 최고의 천신이다. 몸에는 승려와 같은 가사를 입은 뒤 장신구를 착용하였다. 왼손을 내려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을 쥐었고, 오른팔은 굽혀 먼지떨이인 불자를 들고 있다.

<범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대 제작, 경주박물관>

제석천은 고대 인도의 종교인 바라문 교(敎)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신앙되었다. 벼락을 무기로 사용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석굴암 제석천상은 신들의 제왕답게 몸에는 임금처럼 소매가 길고 화려한 도포식의 옷을 입었고, 왼손바닥 위에는 제석천의 무기인 벼락을 형상화한 금강저(金剛杵)를 올려 놓았습니다.

<제석천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경주박물관>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 벽면에는 십일면관세음보살상, 문수보살입상, 보현보살입상과 십대제자상이 새겨져 있다. 

<십일면관세음보살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경주박물관>
<문수보살입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경주박물관>
<보현보살입상 복제품(탁본), 1910년 제작., 경주박물관>

석굴암 석굴로 올라가는 계단길 옆에는 석굴암을 수리 할 때 교체된 옛 석굴건축부재들과 기타 주변 석물이 놓여 있다.

<석굴암 석재들>

천불탑은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탑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유물이다. 탑(Pagoda)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탑파’의 준말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상징물이기도 하다. 서역에서는 사리를 모시는 반구형이 대부분이었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으며 중국에는 벽돌을 쌓은 전탑, 한국에서는 화강암을 깍아 만든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은 편이다.

<천불소탑, 석굴암 출토, 751년, 중앙박물관>
<석굴암 출토 인왕상(금강역사), 중앙박물관>

충주 미륵대원지

충주 미륵대원지(사적)는 석굴암 석굴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큰 돌을 다듬어 축대와 벽체 등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 등 목조 건축물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고려초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의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를 모시고 있다. 석굴 앞에는 오층석탑(보물95호), 석등이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어 규모나 격식을 제대로 갖춘 모습을 하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불상이 모셔진 석굴 내부>
<석굴 앞 마당>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했던 건축부재들>

설악산 계조암 석굴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있는 계조암석굴이다. 설악산 신흥사 부속암자로 울산바위 아래에 있는 작은 석굴사원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향성사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조사 등 고승들이 수행을 하던 작은 석굴로 여러 조사들이 대를 이어 수행하였다고 하여 계조암(繼祖庵)이라 부른다. 설악산의 명소인 흔들바위와 같이 있는데 여러 바위 중에서 둥글게 보이는 목탁바위 밑 굴속에 암자가 있다. 천연동굴을 이용한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던 곳이다. 내부에 특별한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계조암 석굴>
<계조암 석굴 앞 흔들바위>
<계조암 뒷편 울산바위>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승가사는 북한사 사모바위와 승가봉 아래에 해발 450m 정도되는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경사진 언덕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한 사찰로 입구에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며, 사찰 경내에서 북악산과 인왕산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규모가 작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당나라 고종 때 생불로 추앙받던 승가대사를 기리는 의미로 승가사라고 이름을 정하였다고 한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건을 하는 등 여러차례 중건을 하였으며 여러 왕들이 이곳 승가사를 다녀갔다고 한다. 석굴에 조성된 약사전에는 샘이 흐르고 있으며, 이 샘물이 영험이 있다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다.

<북한산 승가사 석굴>
<석굴내부에 모셔진 석조승가대사상(보물)>
<마애여래좌상(보물)>
<승가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강화 보문사(普門寺)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성지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신라 선덕왕 때(635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바다에서 건져올린 돌덩이를 부처로 석굴에 모시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관음성지이지만 관음전을 별도로 두지 않고, 낙가산 정상 아래에 마애관음보살상이 관음전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문사 석굴은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불상을 모셔 놓은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강화 보문사 석굴>
<보문사 뒷편 낙가산 정상 아래 바위, 마애관음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마애관음보살상>

주왕산 주왕암(周王庵)

주왕암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에서 반란에 실패하고 이곳으로 피신왔던 주왕(周王)이 숨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주왕굴 입구>
<주왕굴 내부>

둔황 막고굴(莫高窟)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약 1.6km 걸쳐 약 600 여개의 동굴이 남아 있으며 약 2,400여 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오호십육국 때 처음 조성되기 시작되어으며 원대(元代)까지 약 1,000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5세기 북양 때 조성된 것이며 북위 때 조성된 굴에는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북주(北周)와 수당(隋唐) 조성된 굴에서는 중국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명대(明代) 이후 중앙아시아의 교류가 줄여들면서 교역도시로서 둔황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막고굴도 쇠퇴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장경동에서 많은 고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서구에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둔황 막고굴>

막고굴이 있는 바위산 앞에는 평소에 강물은 없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많이 녹았을 때만 물이 흐르는 강이 있다.  불교에서 바깥세상과 부처님의 세상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이 곳을 흐른 강물이 절벽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 앞을 흐느는 강>

높이 34.5 m 의 북대불전(北大佛殿)은 외부에 드러난 처마만으로도 약 10층 건물처럼 보이는 거대한 석굴이다. 내부에는 미륵불 입상이 모셔져 있으며, 외부는 7층 이상의 목탑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북대불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대십국 때 세워진 석굴이라고 한다. 당시 이지역을 지배한 서하(西夏) 유력자의 지원을 받아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북대불전은 오랜 세월에 유지되어 왔으며, 미륵불상은 수차례에 걸쳐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 미륵불상을 모신 장륙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북대불전>

수백개의 석굴들이 오늘날 아파트처럼 좁은 거리에 몰려있어 한적한 곳에 수행하는 선종계열 사찰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듯 하다. 신라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수 많은 언어로 쓰여진 고문서들이 발굴된 16굴은 막고굴 중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석굴을 조성하는데 종사했던 이름없는 장인들이 거처했던 불상이나 벽화가 없는 석굴들이 있다. 

<장경동이 있는 16호굴 부근 석굴들>
<벽화, 지붕, 출입문 등을 제대로 갖춘 큰 규모의 석굴>
<94호굴 벽화>
<북대불전 부근 벽화>
<북대불전 남쪽 석굴들>
<여행하는 승려, 行脚僧圖, 둔황, 9~10세기, 중앙박물관>
<보살이 그려진 번, 菩薩幡, 둔황(敦煌), 10세기>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柏孜克里千佛洞)

베제클리크 석굴은 실크로드 북로에서 투루판 분지로 들어가는 입구인 화염산 무토우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베제클리크는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으로 현재 77개의 석굴 사원이 남아 있으며 많은 석굴 벽화가 있었다. 불교가 전파된 경로에 남아 있는 석굴 유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베제클리크 석굴은 초기 이슬람인들의 파괴가 있었고, 20세기초 독일인들이 수차례에 주요 벽화들을 도굴해 베를린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화염산 무토우 계곡은 북쪽 산악지역에서 분지로 강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동쪽편 토유크석굴이 있는 계곡이 출입로였는데 고창국이 고창고성에 자리잡으면서 실크로드 북로에서 고창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번성했다. 석굴은 고창고성에서 1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베제클리크 석굴이 있는 계곡>

석굴은 바위를 파서 조성했는데 여러 석굴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배치되어 있으며 앞에는 베란다 역할을 하는 난간이 있는 통로가 있다.

<석굴을 오가는 통로와 테라스>

바위산을 뚫어 석굴 사원들을 조성해 놓았다. 석굴은 둥근 아치형 천장과 직사각형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천정과 벽면은 불화로 장식하고 있다. 석들은 대부분 도굴되어 벽화를 볼 수 있는 석굴은 많지 않다. 하지만 남아 있는 벽화만으로도 당시의 석굴사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석굴내부>
<내부가 비어 있는 석굴>

20세기 초 일본인이 수집하여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중앙아시아 유물인 오타니 걸렉션 중에는 이곳에서 수집한 벽화편들이 있다.

<법화경변단편(法華經變斷片), 베제클리크 석굴 제23굴, 9세기>
<천불도 단편(千佛圖斷片), 베제클리크 석굴 제18굴, 6~7세기>

투루판 토유크석굴(吐峪沟石窟)

토유크석굴은 투루판 도심 옛 고창고성에서 남서쪽으로 약 1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 골짜기로 천산산맥 눈이 녹아내린 물이 투루판분지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옛 문헌에 정곡사(丁谷寺)라 불렸던 곳으로 서진(西晉)시대 처음 조성되어 1600여년 역사를 지닌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불교 유적지 중 하나이다. 위구르 전통 마을이 남아 있는 외진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막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투루판지역에서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주요 교통로였던 곳이다.

<투루판 토요크 계곡>
<토유크 석굴>
<관음보살이 그려진 번, 투루판 토유크 석굴, 9~10세기.>
< 회화 단편(  繪畵斷片), 투루판 토유크 석굴, 10~1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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