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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충북지역은 영남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해 주는 육로와 남한강, 금강을 이용한 내륙수운이 발달한 지역으로 역사이래로 한강유역과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삼국간 치열한 전쟁이 있었던 삼국시대에는 많은 산성을 비롯한 국방유적들이 한강과 금강유역을 비룻한 주요 교통로에 남아 있으며, 주거유적 또한 많이 발굴되는 편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으며, 지방호족들이 주요 교통로에 세운 사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사찰로서 유지되고 있으나 많은 사찰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폐사되어 그 절터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유역을 다투던 전쟁이 임진왜란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불교 또한 크게 번성하지 못했기때문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적들이 충북지역에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조선시대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조선후기 노론을 이끌었던 송시열이 있으나, 그를 모시던 서원이 오늘날 남아 있지 않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교문화 또한 크게 융성했다고 보기는 힘든 편이다. 다만 병자호란 이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충청병영이 있었던 청주에 쌓은 상당산성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학문과 충절의 본향,
예로부터 호서지방은 학문과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일찍이 조선시대 기호유학의 중심지로서 큰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이곳 사람들은 충성을 다했다. 훈민정음 창재와 조선전기 문물제도의 정비에 기여한 신숙주의 영정은 청원에 모셔져 있다. 조선중기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단 김정은 보은 출신이다.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의 묘소화 사당은 진천에 있다. 송시열은 옥천 사람으로 이이로부터 시작해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학문 전통을 계승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하여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웠던 권상하와 정호도 여기 사람이다. 최명길의 손자로 주자학과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던 최석정은 진천에 거주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부사로 있던 송상현은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는데, 왜장마저도 그의 죽음에 감동하였다고 한다. 조헌은 왜란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스님의 승군과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신경행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청난공신에 책봉되었다. 조선말기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은 항일운동의 중심에 섰고, 청원에서 성장한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와 항일언론운동 및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으며, 진천에서 태어난 이상설은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어 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출처:청주박물관>


자치통감, 조선(1436년), '자치통감'은 중국 송나라 사마광(1019~1086)이 편찬한 중국 역사서이다. 1436(세종18)년 '자치통감'을 교정하여 초주갑인자로 찍어낸 것으로, 보물 1281호 '자치통감'과 동일한 판본이다. 우리나라 인쇄문화사에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자, 조선(1772년), 1772년(영조48)년 갑인자로 찍은 '심경'과 '만병회춘'을 글자본으로 주조한 동활자로 그 해의 간지를 붙여 '임진자'로 일컫는다. 갑인자본 계열로 개주 차례에 따라 '오주 갑인자'라고도 부른다.


재주정리자, 조선(1858년), 1796년(정조20)년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로, '정리의궤통편'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로 '정리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러나 1857년 주자소의 불로 정리자가 소실되자 1858년(철종9)에 다시 주성하였다. 이를 재주 정리자라 일컫는다. 글자모양이 단정한 느낌을 준다.


임진진찬의궤 목판, 조선(1892년), 1892년 진찬의 내용을 담은 '임진진찬의궤'를 인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목판이다. 앞면에는 강녕전에서 행해진 야진찬 행사장면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신축진찬의궤' 가운데 야진찬 행사 장면이 새겨져 있다.


임진진찬의궤, 고종의 망오(41세)와 등극 30주년을 기념하여 행해진 궁중연향을 담은 의궤이다. 진찬과 관련된 그림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궁중연회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기호지방
기호지방은 서울 및 경기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말이다. '기畿'는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백리 이내의 땅을 말한다. '호湖'는 호서지방을 가리키는데, 금강의 서쪽이라는 의미이다. 즉 기호지방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충청도지역을 일컫는다. 한반도의 중앙을 차지하며 남쪽은 차령산맥, 동쪽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한다. 금강.한강.임진강이 흐르고 있어 일찍이 인구가 집중되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 과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충청도는 서울과 영남 및 호남을 이어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양쪽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발전해 왔다. <출처:청주박물관>


청주목 지도, 조선후기, 방안이 그려진 '충청도지도'에 있는 청주목 지도이다. 회화식 군현지도와 달리 읍치 지역이 부각되어 표현되는 않았다. 지도에는 읍치, 각 면, 산천, 사찰, 창고, 봉수 등이 그려져 있다.


청주목 중기, 조선(1897년), 중기는 관청에서 관리하던 각종 공용 물품과 재정사항 등을 정리해 놓은 책자를 가리킨다. 관청의 재산을 인수인계할 때 배 이상 유무를 조사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된다. 이 중기는 1897년 청주의 재정 규모를 알 수 있는 중요자료이다.


호서도, 조선후기, 복제품, 충청도 감영이 있었던 공주를 중심으로 인근 주요 지역까지의 도로 교통망과 그 거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지도이다. 청주에는 병영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서는 지금의 충청남북도를 가리킨다.

청주성 이야기
청주성은 현재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북문로, 서문동 일대에 있었던 성으로 '세종실록'에는 둘레가 1,085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래의 실측 결과에 의하면 높이 4m에 둘레가 대략 1,773m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주성에는 성문 4곳, 옹성 2곳, 우물 13곳, 포루 8곳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 청주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1651년(효종2) 충청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해미로부터 청주로 옮겨왔다. 충청병영은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 있었다.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시구개정이라는 명목으로 일제에 의해 청주성이 해체되었는데, 성의 철거로 나온 성돌은 하수구 등을 설치하는 데 사용되었다.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객사터, 우물, 성벽, 기초석 등의 시설이 확인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서원경과 조선시대 읍성관련 유물이 다수 발굴되고 있다. <출처:청주박물관>
 

'병진사월일필역'이 새겨진 성돌,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시구개정이라는 명목으로 일제에 의해 청주성이 해체되고, 성의 철거로 나온 성돌은 하수구 등을 설치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성돌은 2011년 청주시 남문로 남궁타워 공사부지에서 발굴되었다.


송시열 초상(왼쪽), 조선, 복제품, 안동권씨 화천군파 종중 소장. 우암 송시열은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타고난 자질이 엄숙하고 대범하면서도 강직하여 어려서부터 성학에 뜻을 두었고, 자라서는 김장생(1548~1631)에게 배웠다. 의리사상에 퉐하여 북벌사상의 중심인물로 추앙되었고, 의리와 도덕을 강조하여 청나라를 정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1689년 왕세자(경종)의 책봉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영정은 사방모에 심의 차림을 한 송시열의 반신상이다. 송시열 초상(오른쪽), 선산 곽씨 소장 심의에 복권을 쓰고 두 손을 공수하여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송시열의 반신상이다. 얼굴의 울퉁불퉁한 외곽선과 깊이 팬 주름선을 그리고 이목구비를 먹선으로 묘사하였다. '우암연보'에 전해지는 글대로, 높고 높은 산악의 기상이 있으면서도 아울러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신중한 자세가 드러나 있다. 이 초상은 17세기 말엽에 그려진 송시열의 초상을, 19세기 용문영당이 중수될 때 즈음 이모한 본으로 추정된다. 평생 주자의 학설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던 송시열은 문하의 제자들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함에 따라 후학들의 추앙과 존승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 강력한 지배 이념이 되었다. 구부정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어깨선이 거의 반원을 그리면서 화면으 하반을 점하는 다소 과장된 체구는 조선후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유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출처:청주박물관>



권상하 초상, 윤봉구 초상, 종호 초상


인형, 조선, 해주오씨 신녕공파 기증


명기, 조선, 청주시 용정동. 명기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도 평안하기를 바라며 생전에 사용하던 기구, 인물 등 무덤에 함께 넣는 물건을 명기라고 한다. 굽다리접시, 인형, 청자, 순백자 등 다양하며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실생황용 도자기 대신에 따로 작게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사발.접시.병.항아리 등의 그릇과 함께 남녀 종.말 등을 주로 묻었다. 이러한 명기는 죽은 사람에 대해 기록한 묘지와 함께 묻히기 때문에 당시의 생황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청주박물관>


백자제기, 조선 청주 대성동, 이 백자 제기는 청주 대성동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그릇이다. 대성동 향교 제기에는 상준, 작을 흉내낸 굽받침과 두 개의 꼭지가 달린 그릇, 그리고 반찬을 담는 접시와 밥그릇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사용되기 때문에 일반 그릇보다 크게 만들어졌다. <출처:청주박물관>


사명기, 사명기는 조선시대에 각 영에서 대장.유수.순찰사.절도사.통제사 등이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때 사용하던 기이다. 각 진영의 이름에 붙여서 **군사명이라고 쓴 큰 글씨로 지휘관의 신분을 표시하였다. 기의 아래쪽 끝에는 옷고름 비슷한 오색비단을 달았다. "호서제군사명"이라고 수놓여 있는 이 사명기는 송세헌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호서 지역의 군대를 지휘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출처:청주박물관>


삼현려는 '세 현인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세 현인은 송세량의 아들인 송귀수와 송인수, 사위인 성제원을 일컫는다. 애초 삼현려는 송세량이 거주했던 서울 반송방 유점동을 가리켰다. 그러나 송세량이 노년을 청주 마암에서 보냈고, 또 송세량 묘소를 포함해서 마암 부근에 삼현의 유적이 많이 있어서 사람들은 청주 마암을 삼현려로 불렀다. 송귀수는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송안수는 지조와 학문으로 유명하였으며, 성제원은 학생으로 이름이 있었다. <출처:청주박물관>


신경행 청난공시니교서, 조선(1604). 청난공신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29)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진 공신 칭호이다. 신경행(1547~1623)은 청난공신 3등에 책록되어 이 공신교서를 하사받았다.


충암집, 조선(16세기), 김정(1486~1521)이 지은 글을 모아서 간행한 문집이다. 김정는 조광조 등과 함께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다가 기묘사화 때 희생되었다. 유배지였던 제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규압짐, 1907년, 송인수(1499~1547)가 지은 시문을 모아서 간행한 문집이다. 송인수는 송시열의 종증조로 학문이 높아서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청주 마암에서 은거하였다. 제주목사를 지냈고, 제주오현의 한명이다.


중봉집, 조선사론


정천 영춘현감교지, 1705년, 정천을 중훈대부 행 영춘현감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정천은 송강 정철의 현손이다. 1684년(숙종10)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정양 진천현감 교지, 1657년, 정양을 통훈대부 행 진천현감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정양은 송강 정철의 손자로, 병자호란 이후 태백산에서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송시열과 막역한 관계였다.

조선시대 등기문서

오늘날 등기 제도와 비슷하게 조선시대에도 매매가 이루어지면 100일 이내에 관청에 신청하여 그 매매가 합법적이라는 내용의 사급입안을 발급받아야 했다. 사급입안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먼저 물건을 산 사람이 관청에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서를 접수한 관청에서는 물건을 판 사람에게 매도의 사실을 심문하고, 증인에게는 증인으로서 입회한 사실을 심문하며, 문서 작성자에게는 문서 작성의 사실을 심문한다.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으면 관청세서는 사급입안과 함께 그간 작성된 매매문서.사급입안 신청서.물건을 판 사람과 증인 등의 진술서 등을 함께 붙여서 2~3미터나 되는 긴 문서를 물건을 산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이때 각 문서에는 관인을 찍고 담당 관원이 서명하였다. <출처:청주박물관>


노비매매문서


노비매매 사급입안, 1651년, 정양 소유의 노(남자 종) 팔일(이름)이 정상명으로부터 노비 1명을 구입하고 관청으로부터 노비매매 사실을 공증 받은 문서이다.


상평통보, 조선, 충주 복탄리, 상평통보는 조선시대의 화폐로 동전, 또는 엽전으로도 불린다. 가운데에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앞면에는 상하좌우에 '상평통보'라는 한자를 한 자씩 찍고, 뒷면의 구멍 위에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새겼다.


숙명신한첩, 보물 1629-1호, 효종.현종.장렬왕후,인선황후,명성왕후가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67편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모두 국왕과 왕후가 보낸 한글편지이다.


임창순 쓰고 김기창 그린 곽예 고사. 곽예(1232~1286)는 고려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청주이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 비가오면 맨발로 우산을 쓰고 홀로 용화지에 가서 연꽃을 감상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풍치를 높이사서 그 이야기를 많이 읆었다고 한다. 호는 연담이다.


청주박물관 전시실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