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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파주 파산서원, 조선중기 학자 성수침과 성수종 형제 등을 모신 서원

younghwan 2012. 8. 2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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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 남쪽편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 위치한 파산서원은 조선중기 학자인 성수침과 그의 아들 성혼, 동생인 성수종과 백인걸을 모신 서원으로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이 서원은 파평면 일대를 지나서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눌노천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신인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파주지역 유생들이 선조대에 세웠던 서원이다. 원래의 서원 건물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966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원은 제향공간인 사당과 강학공간인 강당, 동.서재 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금은 사당만 복원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원에 모셔진 성수침과 성수종 형제는 조선중기 유학자인 조광조의 제자로 조광자가 기묘사화로 사사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을 연구하면서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죽은 뒤 명종대와 선조대에 관직을 제수 받고 복원되었다고 한다. 파주는 성수침이 낙향한 후 살았던 곳으로 성수침의 처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성수종는 이 곳 외에도 창녕의 물계서원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에 위치한 조선중기 학자인 성수침, 성수종 형제 등을 모신 파산서원. 파평면 일대 마을을 흐르는 임진강 지천인 늘노천이 내려도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인 사당만이 제대로 복원되어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볼 때 원래 강당과 동.서재의 위치가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지형을 맞게 건물을 배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원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 서원 건물 중 1966년에 복원하였다고 하는 위패를 모신 사당.


사당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1966년에 복원 이 건물의 초석과 기단석 등은 서원을 처음 건립했을 당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당 앞에는 이 서원의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오래된 고목이 남아 있다.


사당 오른쪽 아래에는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강당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이 세워져 있고, 그 뒷편으로는 비석이 모셔진 비각이 보인다.


강당 건물


강당 뒷편의 비각. 3기의 비석이 모셔져 있는데 제사를 모시는 공간처럼 보인다.


비각 내부의 비석


비각 앞에 세어진 오래된 비석


서원 사당 앞 넓은 마당.


마당 한쪽편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작은 집이 있다.


서원 앞 파평면 일대를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인 늘노천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서원 입구임을 알려주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에서 보이는 파평서원 전경


서원 앞을 흐르는 늘노천

파산서원
조선 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1493~1563)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 형제 절효공 성수종 및 휴암 백인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 원년(1568)에 율곡 이이 등 파주지역 유생들이 세웠고, 효종 원년(1650)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탔고, 1966년 서원의 사당만을 복원하게 되었다. 사당 주위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정면 가운데에 솟을삼문을 두었다. 건물은 앞면3칸,옆면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 건물의 주춧돌과 기단석 등은 세울 당시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앞면은 툇마루로 개방해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출처:파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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