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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월령면 덕은리에 위치한 용주서원은 조선중기 문신인 백인걸을 모신 서원이다. 백인걸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조광조의 제자 중의 한명으로 기묘사화 때 큰 화를 입지 않았지만 명종대에 여러 벼슬을 역임하다 을사사화 때 파직되고 이후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에 복직하여 선조때까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선조때 청백리로 뽑히기도 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율곡 이이와 파주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였으며,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율곡과 함께 파주지역 서원을 대표하여 이지역 유학자인 성수침 형제를 모신 파산서원을 세웠으며, 파산서원에도 같이 모셔진 인물이다.

 백인걸은 파산서원에도 모셔져 있지만, 파산서원이 세워진 직후인 1598년에 별도로 조감, 김행, 신제현, 백유함과 함께 용주서원에 모셔졌다. 용주서원은 백인걸이 말년에 살았던 집터에 세워진 서원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서원이었지만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지 못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서원은 일제강점기에 1934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서원의 기능 중 하나인 교육기능은 갖지 못하고 사당으로서의 역할만 했던 서원으로 보인다. 서원은 사당과 강당인 정륜당, 내외삼문과 홍살문으로 구성된 단촐한 규모이다.

파주 용주서원,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용주서원은 조선중기 유학자이며 청백리레 녹선된 휴암 백인걸(1497~1579)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1598년(선조31) 건립된 서원이다. 백인걸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던 옛 집터에 지방 유림들이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유생 정재심이 사액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유허비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유생들이 다시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백인걸 선생과 그의 문인이었던 옥천 조감, 장포 김행, 낙금당 신제현, 당산 백유함 선생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 경내에는 정륜당과 사우, 내외삼문, 홍살문 등이 있으며 사우 규모는 정면 7.5m, 측면 5.2m이고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그 좌측에 1862년에 세운 백휴암선생 유허비가 있다. <출처:파주시청>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 있는 용주서원. 율곡선생을 모신 자운서원, 성수침 형제를 모신 파산서원과 함께 파주지역에 남아 있는 서원이다. 백인걸은 율곡과 함께 조선중기 명.선조대에 활동했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파주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백인걸은 파산서원에 먼저 모셔졌기때문에 용주서원은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지 못해서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서원과는 달리 한국전쟁 때 소실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용주서원 외삼문


정륜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용주서원 강당. 앞면 5칸에 겹처마.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용주서원은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서원으로 원래 서원의 중요 기능인 교육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강당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재실과 비슷한 용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기능이 없기때문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도 두고 있지 않다.


사당 출입문.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내삼문 형식을 하고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로 백인걸을 비롯하여 조감, 김행, 신제현, 백유함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서원 입구의 작은 연못.


서원 관리인의 집


서원 앞 월롱면 일대 마을.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파주 용주서원


덕은리 고인돌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용주서원이 있는 파주시 월롱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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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 용주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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