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서원_향교_사당

[성균관] 대성전과 동.서무 (보물141호),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문묘

younghwan 2012. 11. 9. 14:21
반응형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공식적인 명칭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文廟)이다. 중국에서는 국자감, 지방에서는 향교라고 하며 건물의 배치와 기능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은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제향공간이 앞쪽에 인재들을 양성하고 학문을 논하는 강학공간이 뒷쪽에 배치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성균관대학에 그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은 매년 봄.가을에 공제를 제사하는 석전제를 지내는 제사기능만 남았다고 할 수 있으며, 전국 유림들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 제향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뛰어난 유학자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물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건물과는 달리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옆면과 뒷편에 벽돌로 담을 쌓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천도 후인 태조 7년(1398)에 완공되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으로 선조 35년(1602)에 완공하였다. 대성전 앞에 마주보고 있는 긴 건물은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선현들과 우리나라의 뛰어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때인 1604년에 세웠다. 현재는 우리나라 선현들이 위패는 대성전으로 옮기고, 중국 선현들의 위패는 더 이상 모시지 않고 현재는 비어 있다고 한다.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위패를 모신 성묘
태조는 한양 천도 후 태조 4년(1395)에 문묘의 창건을 명하였으며, 태조 6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정종 2년(1402)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5년(1602)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은 남향으로 모두 20간(間)이며, 남북으로는 4개, 동서로는 5개의 기둥이 있으며, 앞에는 당(堂)이 있고, 뒤에는 실(室)이 있다. 대성전은 높은 장대석기단을 쌓고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짠 다포(多包)양식이다. 정면 5간(間) 측면 4간(間)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단층구조이다.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초제공, 이제공은 모두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놓이는 첨차는 삼분두형으로 되어 있다. 내부의 출첨들은 초제공과 이제공의 끝은 교두형이지만 삼제공 끝은 역시 삼분두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의 현판(懸板)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출처:성균관>


성균관 제향공간의 중심건물인 대성전. 공자를 비롯한 제자들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대성전은 조선 건국 직후에 처음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성균관 대성전.


대정전은 3도의 형식을 하고 있는 궁궐 정전이나 종묘 정전과는 달리 2개의 계단으로만 되어 있다.


대성전 삼문에서 사당까지는 전돌을 깔아 놓은 하나의 길만이 있다.


위패가 모셔진 내부 공간으로는 들어가는 출입문. 건물 양식에서는 조선시대 이전 건물양식과 중국의 건물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중기 명필로 잘 알려진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안쪽에는 성묘(聖廟)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공포는 전형적인 다포계양식을 하고 있으며, 화려하게 단청을 입지지는 않고 있다.


전돌을 깔아 놓은 대성전 앞 월대.


성균관 대성전

동무/서무 (보물141호), 현인들의 위패를 나누어 모셨던 곳
태조의 한양 천도 이후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에 중건(重建)되었다. 대성전의 좌·우측에 있으며, 동무는 서향, 서무는 동향이다. 각각 11간(間)으로서 맞배지붕 양식이다. 동·서무에는 본래 공문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국의 한(漢)·당(唐)·송(宋)·원(元)의 제현(諸賢) 및 우리나라의 18현(賢) 등 112위(位)를 동·서로 봉안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고, 그 밖의 중국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 위패를 태워서 땅에 묻음)하여 현재 동·서무는 비어 있다. <출처:성균관>


성균간 동무.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긴 건물로 제향공간인 대성전에서 회랑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서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뛰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건물로 지금은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는 대성전으로 옮기고, 중국 선현들의 위패는 모시지 않고 있다. 현재는 빈 건물이라고 한다.


제향공간에서 회랑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동무 앞 공간.


건물은 단청을 입히거난 화려한 공포를 하고 있지 않다.


서무도 동무와 같은 건물 구조를 하고 있다.


성균관 제향공간 출입문이 삼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당출입문이다.


삼문 앞에서 본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제향공간. 정면에 대성전이 있고, 양쪽에 회랑처럼 지은 동.서무가 있다. 마당에는 측백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성균관 대성전 삼문 옆에 심어진 은행나무와 대성전 앞 상강오륜목이라고 부르는 측백나무


명륜당 앞 은행나무 못지않게 굵은 삼문 옆 은행나무


마당에 심어진 소나무


대성전 뒷편 명륜당 마당의 은행나무


마당 한쪽편에 세워진 비석


비석의 거북받침돌


강학공간인 명륜당에서 대성전으로 들어오는 작은 쪽문


대성전 앞 마당


명륜당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대성전


2009년 대성전 앞 마당


중국 북경의 국자감 대성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