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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양양 선림원지, 백두대간 구룡령을 넘어가는 길목 미천골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엣 절터

younghwan 2012. 4. 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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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 선림원지는 양양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인 구룡령아래 미천골 계곡이 끝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이 곳 지명이 '쌀을 씻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는 뜻이 미천골이라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선림원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던 사찰이었고, 이 곳 선림원 부근에서 하루를 묵고 구룡령을 넘어갔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림원은 그 이름에서 느끼기에는 고려시대 교통로에 있었던 여관 기능을 했던 사찰로 이해하기 쉬우나, 원래는 통일신라시대 홍각선사가 세웠던 승려들이 수도하던 선종계열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부근에 위치한 양양 진전사와 함께 설악산의 맑은 산수와 드넓은 동해바다를 가까이 하면서 수도를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일찌기 선종계열의 사찰이 이곳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구룡령이 양양지역에서 백두대간을 넘기에는 제일 수월했던 길이었기때문에 많은 여행객들이 이 곳 선림원에 묵었던 것도 사실일 것으로 생각된다.

선림원은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산사태나 화재 등의 자연재해로 옛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닌 듯하고 그리 넓어보이지 않는 현재의 선림원지 절터는 옛 사찰의 일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절터에는  삼층석탑(보물 제444호)과 부도(보물 제447호), 석등(보물 제445호), 부도비(보물 제446호)들이 남아있는데, 이 유물들로 보아서도 선림원은 규모가 컸던 사찰로 생각된다.


기단부에 8부중상이 세겨진 규모가 있어 보이는 선림원지3층석탑이 선림원지 옛절의 중심을 잡고 있다. 3층석탑 뒷편으로는 금당건물이 있었던 건물터가 있다. 금당터 이외에는 눈에 뛰는 건물터 흔적은 잘 보이지 않고 절터의 면적 또한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선림원지3층석탑 뒷편에 위치한 금당터. 송광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선종계열의 사찰은 찾아오는 신도들을 위해서 불전을 크게 짓기보다는 수도하는 승려들을 위한 승방건물 위주인 경우가 많은데 선림원 또한 그런 형태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경주나 부여 등 도시 부근에 있었던 사찰들은 건물 초석도 세련되게 가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 선림원지의 초석들은 크게 가공하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가공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가공한 건물초석.


금당 왼쪽편에 있는 건물터. 일반적 사찰의 가람배치 등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강당이 있었던 건물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선림원지 뒷편 절터에 있는 보물 447호인 선림원지 승탑. 이 승탑은 일제에 의해 파손된 것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라 하며 기단부만 남아 있다. 원래의 위치가 이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선림원지 절터 왼쪽편 끝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등(보물 제445호)부도비(보물 제446호)가 있다.


선림원지 석등(보물 제445호)부도비(보물 제446호)


석등과 부도탑 옆에 있는 작은 건물터. 아마도 작은 불전이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터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곳도 있는데, 크고 작은 승방들이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선림원은 규격화된 평지사찰의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자연적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서 건물들을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림원지 절터


미천골 계곡에서 절터로 올라가는 길


선림원지 종. 이 종은 1948년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발견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타 잔편만이 남아 있다. 원래 크기는 전체 높이 122cm, 입 지름 68cm이다. 8세기 종에 비해 크기가 주어들면서 종의 외형은 가늘고 길어졌다. 연곽 안에 장식된 9개씩의 연꽃봉오리는 나즈막하고, 화려한 당좌 좌우로는 2구1조로 된 주악상이 조각되었다. 몸 뒤로 피어오른 구름과 연화대좌에 앉아 횡적과 요고를 연주하는 모습으로서 정면관인 상원사종 주악상과 달리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결가부좌한 자세로 변화되었다. 머리 뒤로 흩날리는 천의자락도 훨씬 간략화되었으며 횡적을 부는 천인상은 같은 9세기의 실상사종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다. 이 선림원지 종은 몸체 내부에 명문이 양각되어 있어 독특한데, 정원 20년인 통일신라 804년에 만들었고 종 주조에 관계된 시주자 명단 등을 통해 당시 관직명과 이두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비록 완형은 아니지만 통일신라 9세기 초의 귀중한 편년자료로서 새롭게 그 원형을 복원하게 된 의미깊은 작품이다. <출처:춘천박물관>


도깨비기와(Roof tile with monster eye design), 양양 선림원지


연꽃무늬 수막새(Roof-end tiles with lotus design), 마루 수막새(Roof coner tile), 양양 선림원지


당초무늬 암막새(Roof-end tiles with arabesque design),



선림원은 9세기경에 홍각선사가 지었다는 큰 절로 승려들 수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언제 불에 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1948년에는 신라 동종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종은 상원사 범종, 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다. 월정사에 옮겨 보관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남아있는 문화재로는 삼층석탑(보물 제444호)과 부도(보물 제447호), 석등(보물 제445호), 부도비(보물 제446호)들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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