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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경주 흥륜사지 (사적 15호),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출토된 영묘사 절터도 있었다고 알려진 신라 칠처가람

younghwan 2012. 6. 2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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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대인 527년이며, 당시 신라 귀족들의 반발로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되었다. 당시 신라귀족들이 반발한 것은 이차돈이 당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인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당시에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불교를 국가적인 종교로 받아들이기 위해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에 세웠던 사찰을 신라 칠처가람이라고 하는데 경주 도심 동쪽편의 분황사와 황룡사, 서쪽편 형산강변에 위치한 담엄사, 영묘사, 영흥사, 흥륜사가 있고, 낭산자락에는 사천왕사가 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천경림에 절을 세움으로서 신라는 빠른 시일내에 불교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중 경주시 사정동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 무덤이 있는 경주 오릉 북쪽편에 위치한 흥륜사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가장 먼저인 644년에 지어진 절이다. 이곳에는 원래 미추왕대에 고구려 승려 아도가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에 처음을 절을 지었다고 한다. 흥륜사 절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이 곳에서 '흥'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흥륜사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이 곳은 선덕여왕때 세운 영묘사 절터이고 실제 흥륜사는 영흥사가 있었던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흥륜사는 이차돈 순교 이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대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진흥왕은 말년이 스스로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절이다. 이 절에은 선덕여왕때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진 오당과 아도, 이차돈 등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는 금당이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큰 절이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화재로 소실된뒤 폐사되었다고 한다.
 
 영묘사 또한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고 하며, 이절에서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유명한 예술가이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기와에서 화려한 조각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절터에서는 신라를 대표하는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를 비롯하여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 중 가장 큰 규모의 석조와 배례석, 생동감 넘치는 조각수법이 빼어난 도깨비 얼굴 모양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이 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는 사적 15호로 지정된 흥륜사 절터. 신라왕실과 관계가 깊은 아주 큰 절이었지만, 지금은 절터의 일부만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는 흥륜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지금은 사찰의 정원처럼 이용되고 있는 흥륜사 절터. 이 곳 주변에서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출토되었으며, '흥'자가 적힌 기와와 '영묘사'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이 곳에 있었던 사찰의 존재가 '영묘사'인지 '흥륜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륜사 절터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옛 건축부재들


사적으로 지정되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흥륜사 절터. 현재 사찰이 위치하고 있어서 본격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흥륜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들로사자무늬 수막새, '사'가 새겨진 암키와, '흥'이 새겨진 수키와, 연꽃무늬 수막새이다. 흥륜사는 신라최초의 사찰로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같은 위치에 출토된 것 같은데, '흥'자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 흥륜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굴무늬 수막새, 경주 영묘사 터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수막새로 사람얼굴을 하고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수막새는 지금도 경주를 대표하는 이미지나 상징물로 여겨지는 중요한 유물이다.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것을 일본인이 보관하다가 1972년에 기증한 것으로 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묘사'가 새겨진 암키와, 영묘사 터, 8~9세기, 경주박물관 소장. 이 절터는 원래 흥륜사 절터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곳에서 '영묘사'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지금은 영묘사 절터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는데 확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도깨비기와.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영묘사터에서 발견된 수막새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도깨비문양이 새겨진 기와이다. 생동감있고 힘이 넘치는 문양이다.


용무늬 얼굴을 하고 있는 기와. 신라 최고 조각가이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이다.


흥륜사 절터와 영묘사 절터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연꽃무늬 수막새


경주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는 흥륜사 절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석조. 신라에서 만들어진 석조 중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석조에 조선 인조대에 경주부윤이 이 석조를 흥륜사에서 경주읍성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석조에 담긴 물에 하늘이 비친 것을 표현한 "천광운영(하늘빛, 구름 그림자)"을 크게 새겨져 있다.

석조, 경주 흥륜사터 출토, 통일신라 8~9세기
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담았던 것입니다. 이 석조에는 많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경조의 윗부분에는 경주 부윤 이필영이 인조 16년(1638)에 이 석조를 흥륜사에서 경주읍성 안 금학헌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이 새겨진 반대편에는 이교방이 무자년 유두날 이 석조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가 있습니다. 측면에는 석조에 담긴 물에 하늘이 비친 것을 표현한 "천광운영(하늘빛, 구름 그림자)"을 크게 새겨 넣었습니다. <출처:경주시청>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도 조선시대에는 영묘사에 걸려 있다가 경주읍성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흥륜사 절터에 있는 사찰인 흥륜사 대웅전


흥륜사 마당.


흥륜사 절터 유적지 앞에 있는 요사채


마당 한가운데에는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차돈 순교비가 있다.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 경주도심의 모형 중 흥륜사가 있었던 지역.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능이 있는 경주 오릉 뒷편에 흥륜사(영묘사)가 위치하고 있다.

경주 흥륜사지, 사적 15호, 경주시 사정동
이 곳은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뒤 544년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흥륜사의 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온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미추왕의 딸인 성국공주의 병을 부처님의 힘을 빌어 낫게 하고자 미추왕에게 청하여 천경림에 이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절의 금당에 선덕여왕때의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아미타삼존상과 아도를 비롯한 신라십성의 상을 흙으로 빚어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수습된 바 있어, 선덕여왕 때 처음 건립한 영묘사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사터로 보기도 한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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