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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나주목 관아] 나주객사 금성관

younghwan 2010. 9. 2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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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의 규모를 잘 보여주는 건물인 나주 객사인 금성관 건물이다.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통제영 객사인 통영 세병관이나, 여수 진남관보다는 작지만, 전주 객사와 비슷한 규모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청건물로 개조되어 사용하다가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서쪽 날개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건물로 보이며, 동쪽 날개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비슷한 건물들을 보면 동쪽 날개 건물이 많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중앙에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 있고, 양쪽 날개에 손님이 묵는 방이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금성관 편액

금성관 내부. 넓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금성 서쪽 날개 건물. 앞면 5칸의 건물로 2칸은 방, 3칸은 마루로 사용되고 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 동쪽 날개 건물.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보이며 앞면 6칸 중 2칸은 방, 4칸은 마루로 사용되고 있다.

뒷쪽에서 본 나주 객사인 금성관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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