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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_종묘

서울 선농단,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왕이 직접 친경을 하던 곳

younghwan 2010. 9. 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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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제기동에는 사직단과 함께 조선시대에 중히 여기던 선농단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왕이 고대 중국의 제왕으로 농업의 신으로 통하는 신농씨와 후직씨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을 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 제를 끝내면 소를 잡아서 가마솥에 끓여서 농부들과 구경나온 노인에게 나누어 주었던 설렁탕의 유래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왕의 친경지는 종암초등학교로 변했고, 선농단도 작은 제단과 향나무들만 남아 있는 큰 볼거리는 없는 유적으로 변했지만, 조선시대 국가를 경영하는 기본 철학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이 선농단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설치한 지극히 유교적인 장소로 선농단에 심어진 오래된 수령의 향나무는 중국 북경 문묘의 향나무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향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선농단. 조선시대 선농단 제례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제단의 규모는 단촐하고 검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직단과는 달리 중국풍 제단의 모습이 가장 많이 반영된 곳으로 보인다.


선농단 입구에 있는 돌기둘. 패루나 홍살문 같은 형태의 출입문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음.


향나무 숲 안쪽에 마련된 작은 제단.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선농단 향나무. 이 선농단 향나무는 중국의 예법에 따라서 심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곳에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한다고 한다. 수령이 500년 이상 된 것이라고 한다.

서울 용두동 선농단의 향나무는 나이가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약 13.1m, 가슴높이의 둘레는 약 2.28m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농단(先農壇)을 만들어 중국의 예에 따라 농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을 모시고 왕이 직접 나와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제사가 끝나면, 사용된 막걸리를 나무에 뿌려주었고, 소를 잡아 큰 가마솥에 넣어 국을 끓이며,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어서 농부들과 구경나온 노인에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설렁탕이라는 이름은 선농단에서 끓인 국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 되었고 다시 설롱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향나무는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몇 개의 초석과 향나무만이 남아 있다. 서울 용두동 선농단의 향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 관련된 자료로서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5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츌처:문화재청>


지금 선농단은 주택가에 위치한 작은 공원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선농단 앞에 있는 국왕의 친경지는 종암초등학교로 변신해 있다.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삼국 신라시대 때부터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이미 농사의 삼신(三神), 즉 선농과 중농, 후농에 제사를 지내는 등 선농제향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도 선농제는 행해졌는데 중국 의식을 따라 정월 해일에 적전(籍田)에서 신농씨와 후직에게 제사를 지냈다. 성종 2년(983) 정월 신미일에는 환구단에서 기곡제를 지내고 같은 달 을해일에 적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불교나 팔관회와 같은 고유 전통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이 시대의 선농제는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에 의거한 선농제가 국가의 주요 전례(典禮)가 되었고 그 의미도 강화되었다. 태종은 선농제의 제향일을 정월 길(吉) 해일에서 경칩 이후 길한 해일로 바꿔 거행하고 친경의계를 제정하였다. 중농․후농제를 폐지하고 대신 삼신을 대표하는 선농제만 모셨다. 태조 1년(1392)에는 한양 근교에 왕이 친경(親耕)하는 전지(田地)인 동적전을 설치하고 경작하였으며 이를 관장하여 경작과 수확을 살피는 고직인 적정령이 내려지고 승(丞)이 설치되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선농제를 위한 제단의 단과 유의 설치 규정이 마련되었다. 세종 재위 당시에는 친향선농의와 친경의주를 제정하고 《국조의례의》, 《길례》에 선농단과 경작에 대한 의식을 규정하였다. 성종은 《국조오례의》의 친경의례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성종 7년(1476)에는 친경대를 신축하고 처음으로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영조 43년(1767)에는 친경의궤를 편찬하고 권농과 고례를 특히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순종 3년(1909)에는 사직단으로 위패가 옮겨지고 선농단 일원이 국유화되면서 제향이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선농단이 위치한 곳에 청량대(凊凉臺) 공원을 조성하고 숭인보통학교(현 서울종암초등학교)를 세워 선농제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말살하였다. 폐지된 제향행사는 1979년에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선농단친목회에 의해 비로소 재개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에서 인수받아 매년 선농제를 모시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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