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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국보8호)

younghwan 2010. 12. 1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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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보령시에서 내류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통일신라시대의 큰 사찰이었던 성주사지 옛 절터를 볼 수 있다. 보령 성주사지에는 이 사찰을 창건한 낭혜화상의 탑비를 비롯하여 5층석탑과 3기의 3층석탑이 있는 큰 절터이다. 절터는 금당과 강당, 석탑으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 사찰배치를 하고 있으며, 당시 산속에 많이 세워졌던 다른 사찰과는 달리 전통적인 평지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성주사지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성주사를 크게 중창한 낭혜화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낭혜화상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와서 이 곳에서 성주산문을 창설한 인물이다. 이 탑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진성여왕때라고 하며,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탑비 중에서는 가장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한다. 탑비에 새겨진 글씨는 당대의 문인이자 유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지은 글이라 한다. 낭혜는 국왕이 내린 시호이고, 탑 이름은 ‘백월보광’이라고 한다.


충남 보령시의 뒷산 역할을 하는 성주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사 옛 절터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이 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어 놓고 있다.  이 탑비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승려의 탑비로는 그 제작연대가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거북모양의 받침돌. 용이 불을 뿜을려는 듯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거북머리는 한쪽편이 깨져 있는 점이 약간 아쉬운 점이다. 머리 한가운데에는 둥근 뿔이 솟아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거북받침돌의 발.



거북받침돌의 뒷면. 등에는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겨놓고 있으며, 중앙에는 구름무늬가 있다.


거북모양의 받침돌


탑비 몸돌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을 적은 글들이 새겨져 있는데, 당대의 유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지은 글이라 한다. 내용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몸돌 위에 머릿돌을 얹어 놓고 있는데, 연꽃과 구름, 용이 뒤엉켜 있는 전형적인 비석의 머릿돌 모습을 하고 있다.


옆에서 본 탑비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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