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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홍성 조양문, 홍주성의 동문

younghwan 2011. 1. 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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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주성은 조선시대 홍주목 관아가 있던 읍성으로 지방 읍성 중에는 규모가 제법 크고, 잘 보존되어 있는 읍성 중의 하나이다. 홍주성 내에는 홍주목 관아와 주요 행정시설들이 있었는데, 정3품이 목사가 다스리던 고을로 관아의 규모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성에는 남쪽과 서쪽의 성벽, 동헌, 아문과 동문인 조양문이 남아 있다. 홍주성은 구한말 고종때 대대적인 수리를 한 성곽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최근에 축성한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홍주성에는 동문인 조양문,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망화문으로 3곳에 문루를 세웠었는데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에 조양문만이 남아 있다. 조양문은 구한말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으킨 의병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로 상당부분 파괴되어 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은 서울의 숭례문처럼 도심 한가운데에 이 고장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듯이 우뚝 서 있다.


홍주성 성문인 홍예. 구한말에 세워진 문루로 작은 지방 읍성의 성문들과는 달리 커다란 화강암 석재를 사용해서 쌓은 문루이다.


조양문 문루. 문루의 현판은 원래 흥선대원군이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의 현판은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옆쪽에서 본 조양문 문루


구한말 의병들과 일본군의 전투로 많은 부분이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문루을 쌓은 석재에서 복원된 부분이 드러나 보인다.


홍주성 조양문 홍예


홍주성 바깥에서 본 조양문. 구한말에 지었지만 당시의 읍성에서 많이 사용하였던 옹성 등은 설치해 놓고 있지는 않다.



 이 문은 홍주성 동문으로 조선 고종3년(1870)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로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며 대원군이 친필로 문액을 썼다고 한다. 남문은 문루가 없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병들의 사열을 실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때는 수백명의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또한 1906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일으킨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하여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 <출처:홍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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