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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서쪽편 남천을 건너는 월성교 다리 주변에 위치한 경주 교촌에서도 향교와 함께 랜드마크가 되었던 경주 최부자집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택이다. 이 가옥은 1700년 대에 건립된 가옥으로 구한말 대부분의 대지주 저택과 마찬가지로 99칸 규모의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와 큰 광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랑채는 70년대에 불타버린 것을 복원한 건물이라고 한다. 경주 최부자집은 영남일대에서 손꼽히는 부호이지만 저택의 건물규모가 크거나 화려하게 꾸며놓고 있지는 않고 일반적인 양반촌의 저택 정도 규모를 하고 있다. 지금도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많은데, 조선시대에도 경주를 찾아 유람을 떠나왔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 대부분은 이 집에서 묵었다고 하며, 손님접대를 성실히 했다는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일제강점기 황태자시절에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국왕도 이 저택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 가옥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대지주 집안의 종가로, 일제강점기 독립유공가 최준의 생가이기도 하다. 경주 최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집안은 오늘날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보였던 조선시대 부호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부터 이 곳에서 터를 잡은 경주최씨 집안은 9대 진사, 12대 만석군을 배출한 집안으로 벼슬은 체면유지용으로 진사까지만 하고 정치에 끼어들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고 실제를 대부분의 후손들이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다만 마지막 부자라 할 수 있는 최준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고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전 재산을 기부하여 현재의 영남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저택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문간채. 입구에는 이 저택과 독립운동가 최준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이 양쪽에 서 있다.


경주 최부자집 사랑채. 앞면 5칸으로 동쪽에 누마루를 달아 내은 형태를 하고 있다. 실제 이 건물은 1970년대에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복원한 건물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손님들을 접대했던 공간이 대청마루와 손님들이 머물렀던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복원된 건물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 경주를 방문했던 유명 인사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보이는 사랑방과 대청마루. 화려하게 꾸며놓고 있지 않으며, 손님이 편안하게 쉬도록 배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 동쪽편으로는 2칸 규모로 누마루와 사랑채를 달아내어 놓고 있는데, 이 집 주인이 주로 사용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한옥에서 크게 유행했던 누마루


이 가옥은 잘 다듬은 화강석 석재로 기단을 쌓고 있는데, 실제로는 경주지역에서 뒹굴던 신라의 집터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마당 한쪽편에 놓여 있는 옛 초석. 잘다듬어진 석재로 신라의 궁궐터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당 한쪽편에는 옛 사찰에서 석조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와 석탑의 지붕돌처럼 보이는 석재를 볼 수 있다.


실제 건물을 받치고 있는 초석


사랑채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


광과 문간방으로 이루어진 문간채


문간채 옆으로 새로운 건물이 복원되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에 맞배ㅐ지붕을 하고 있는 큰 광채


이 고택에서 원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안채. 'ㅁ'자형으로 건물이 배치된 안채는 만석군 부호 안주인이 살았던 살림집이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소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경주를 찾았던 많은 인사들을 접대하느라 항상 바빴을 것으로 보이는 최부자집 안채와 안마당


안채는 앞면 7칸 규모의 본 건물을 중심으로 4칸 정도의 날개채를 달아 내어 놓은 형태이다.


안채 대청마루


안채는 여자와 어린애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큰 방보다는 작은 받을을 여럿두고 있으며, 통로 용도로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안채에서 부엌이 있는 날개채로 달아 내어 놓은 공간.


안채 마당은 그리 넓게 조성해 놓고 있지 않다. 주변에 석재들이 많아서 그런지 화강석 석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 경주시 교동 69
이 가옥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았고,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자 모양이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출처:경주시청>

독립유공자 최준선생 생가,
문파 최준 (1884~1970) 선생은 이른다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햐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경주시청>

경주 최부자집의 가르침
최부자집은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육훈'과 '육연'을 가슴에 새겨 '베푸는 삶'을 실천했다. 최부자집 사람들의 실천의지는 중용과 의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가치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빼어 심기 위해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호는 '대우(크게 어리석음)'였으며, 부친 최현식의 호는 '둔차(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이었음을 알 수 있든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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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교동최씨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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