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용강동 고분 (사적 328호), 통일신라시대 복식과 당나라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

younghwan 2012. 6. 19. 16:12
반응형


 경주 용강동고분은 경주시 용강동 밭 가운데에 남아 있던 고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지금은 경주 신도심 중앙, 경주시청 북쪽편으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 한가운데 공원처럼 남아 있는 신라의 고분이다. 지금은 둘레석이 있는 통일신라시대 고분처럼 복원해 놓고 있지만, 원래는 밭 한가운데 작은 봉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통일신라시대 무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을 돌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오랜 기간동안 도굴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라고 한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어 여러차례 시신을 묻을 수 있는 형태로 가족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무덤의 형태는 지방에서 먼저 사용하고, 수도의 경주로 확산되어 통일신라시대 중앙 귀족들의 무덤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경주 신도심이 들어서기전인 1985년에 정식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여러 차례 도굴이 있었다고 하지만, 내부에는 통일신라시대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문인상, 무인상 및 여신상을 비롯하여 많은 토용들, 청동제 십이지신상을 비롯하여 글자가 새겨진 그릇 등이 있다. 무덤이 조성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7~8세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토용들은 당나라 토용들과 비슷한 형식으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의 복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경주 도심 북쪽에 조성된 신도심 한가운데 남아 있는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인 용강동 고분. 원래 이 주변은 농경지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 남아 있는 작은 공원처럼 보인다.


현재의 형태는 봉분에 둘레석을 하고 있는데, 봉분자체가 많이 훼손되어 당시의 신라고분 형태를 추정하여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용강동 고분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인 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구조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신을 함께 묻을 수 있어서 가족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5세기 후반 지방에서 먼저 등장하고 경주로 전해져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경주 용강동 고분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뚜껑합. 중앙박물관 소장


문관상, 8세기, 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용강동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 관료의 복식을 잘 보여주고있다. 신라는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한 이래로 당나라의 복식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여인상, 8세기, 중앙박물관 소장,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상류층 여자들의 복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인상, 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도 여러 여인상이 출토되었는데, 체격이 큰 여인상과 작은 여인상이 같이 출토되었다.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여인상, 경주박물관 소장


문인상, 경주박물관 소장


남자상, 경주박물관 소장


당나귀와 수레바퀴, 말, 경주박물관 소장


청동십이지상, 7~8세기, 이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십이지산상이다.


井자가 새겨진 토기로 만든 합.



경주 신도심 한가운데 남아 있는 용강동 고분


원래 농경지였던 고분 주변은 아파트가 들어선 주거지역으로 바뀌어 있다.


용강동 고분 주변 주택가


경주 용강동 고분

경주 용강동 고분, 사적 328호, 경주시 용강동
이 고분은 '개무덤', '고려장'으로 불리던 폐고분으로, 파괴가 심하여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발굴조사하였다. 석실의 구조는 남벽의 중앙에 연도가 연결되어 정방형의 단실분으로, 네 벽 모두 장방형의 깬돌로 정연하게 쌓고 시상 높이에서 내부로 활모양 상태를 이루게 하였다. 시상은 서벽과 북벽에 붙여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데, 벽쪽을 제외한 가장자리에 편평한 깬돌을 쌓고, 그 내부를 깬돌과 냇돌로 채운 다음 점토로 두텁게 바르고 회칠로 해서 마무리했다. 석실 내에서 사람의 치아와 함께 도용, 흙으로 만든 말, 청동제 십이지산상, 토기, 구슬, 돌베개 등이 출토되었다. 토용은 높이 12~22cm로 전신상을 흙으로 채색한 것이다.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사실적이다. <출처:경주시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