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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일성왕릉 (사적 173호), 남산 신성아래에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무덤

younghwan 2012. 6. 2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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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탑동 남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능이다. 일성왕릉은 신라초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그 존재는 조선후기인 영조 6년(1730) 이후라고 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초기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던 왕들의 능인 경주 오릉과 비슷한 성격으로 정확한 조성내력이 알려지지는 않았고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를 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북방의 말갈족과 충돌이 있었으며, 농업을 권장하고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성왕릉이 위치한 곳은 경주오릉에서 남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라 6촌 중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 신라가 멸망할 때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던 경애왕과 관련된 유적지인 포석정과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일성왕릉은 경주 월성 남서쪽에 위치하여 궁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남산신성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서남쪽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국방상 아주 중요했던 지역이며, 특히 남원, 합천을 거쳐서 침입했던 백제의 주공격 경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박혁거세와 관련된 박씨들의 근거지가 되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 북쪽편 남산신성이 있는 해목령 아래 경사진 지형에 위치하고 있는 일성왕릉. 봉분 지름 15m로 주위 환경 등으로 볼 때 돌방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의 봉분에 후대에 여러차례 정비한 것으로 보이다. 경주 오릉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왕릉 조성내력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외관상 무덤의 구조에 특이한 점은 없어 보인다.


일성왕릉 봉분 지름 15m, 높이 5m 정도로 외관상으로도 일반 봉분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왕릉으로서의 존재는 조선후기인 영조대에 알려졌다고 한다. 앞에 놓인 상석과 봉분 외형은 후대에 고쳐진 부분이 많다고 한다.


봉분은 경사진 언덕에 돌로 축대를 쌓아 조성하였는데, 봉분 앞 낮은 축대와 상석과 함께 후대에 조성한 부분이라 한다.


일성왕릉 들어가는 길


왕릉 앞으로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그 앞으로 이 곳에 남간사 절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남산 북쪽 해목령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일성왕릉 입구. 왕릉 양쪽 능선을 따라서 궁성인 월성을 지키던 남산 신성이 있었다.


일성왕릉 뒷편 남산 신성으로 올라가는 길.


일성왕릉이 있는 남산신성 아래로는 형산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그 너머로 대구에서 영천, 건천을 거쳐서 연결되는 교통로와 합천, 창녕, 청도를 거쳐서 경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는 국방상 중요한 지점으로 백제의 경주공략을 위한 주공격로라고 할 수 있다.


일성왕릉 뒷편의 경주 남산 북쪽 해목령 일대.


일성왕릉 들어가는 길에 있는 작은 사찰

신라 일성왕릉, 사적 173호, 경주시 탑동
이 능은 신라 제7대 일성왕(재위 134~154)을 모신 곳이다. 경주 남산의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성왕의 성은 박씨인데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 15m, 높이 5m인데 둘레의 돌이나 주위 환경으로 보아 내부 구조는 돌방으로 추정된다. 이 능은 조선 영조 6년(1730)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한 왕릉이다. 한편 이 왕릉은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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