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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수도 부여를 가면 금강(백마강) 하류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 금강 하류의 논산부터 노령산맥 이북의 호남평야를 경영할 수 있는 육로, 수로상 아주 중요한 위치에 수도를 정했음을 느낄 수 있다. 반면에 부여는 백제가 삼국시대에 신라에 멸망한 까닭에 경주에 비해서 유적지가 아주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예술적 기질과 성과는 일본 나라의 동대사 등 일본과 익산의 미륵사 등에 오히려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는 백제의 많지 않은 예술적 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정림사지가 들어선 위치는 부여의 중심지역으로 경주의 황룡사지의 위치와 비슷하다. 정림사지와서 새로 알은 사실은 우리는 정림사지 5층석탑이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이 그 기념으로 정림사에 탑을 새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소정방이 정림사지 5층석탑에 낙서를 남김으로서 사실이 왜곡되어 전해 왔다는 것이다. 정림사지는 아마 부여의 중심사찰로서 지금 서울의 조계사, 경주의 황룡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정림사지내 유물/유적:
1.백제 불교 역사를 설명해 주는 정림사지 박물관,
2.고려시대 만들어진 석불좌상,
3.백제 석탑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의 넓은 경내에 5층석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정리마지 넓은 마당에 5층석탑이 외로이 오랜 세월을 지켜온 모양입니다.
정림사지에 있는 석불좌상입니다.
※ 정림사지내 유물/유적:
1.백제 불교 역사를 설명해 주는 정림사지 박물관,
2.고려시대 만들어진 석불좌상,
3.백제 석탑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 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태평팔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된다. 이 문자와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 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伽藍配置形式)을 보면 전형적인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세워졌으며 주위(周圍)를 회랑(廻廊)으로 구획(區劃)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 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 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출처: 부여군청>
*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 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 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출처: 부여군청>
정림사지의 넓은 경내에 5층석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정리마지 넓은 마당에 5층석탑이 외로이 오랜 세월을 지켜온 모양입니다.
정림사지에 있는 석불좌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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