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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능선)

younghwan 2010. 9. 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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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읍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이 있는 산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고분산을 연상시키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높지 않은 산능선을 따라서 수십기의 대가야 고분들이 줄지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령에는 많은 대가야 무덤들이 남아 있지만 이 곳 지산동이 지배층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주능선을 따라서 있는 거대한 왕의 무덤부터 소규모의 귀족층의 무덤 등 다양한 고분들이 철의 왕국 대가야의 번영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지산동 뒷산 능선을 따라서 줄지어 있는 대가야 고분군입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들이 검을 얻었던 고분산을 연상시킵니다. 대가야가 철의 왕국이었다는 것이 우연인지는 몰라도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고분군 중에서 대형급인 44호분입니다. 이 분묘에는 피순장자들이 함께 묻혀있었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이며, 장신구·무기·투구·마구·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지산동유적에서 최대형급에 속하는 44호분과 45호분은 대형의 구덩식돌방무덤과 다수의 돌덧널을 매장주체로 하는 고분이다. 44호분의 경우 지름 25~27m 가량의 원형에 가까운 대형봉토 내부의 중앙에 으뜸돌방[主石室]이 위치하고 이 돌방의 장벽과 단벽 쪽에 각기 1개씩의 딸린돌방[副石室]이 배치되어 모두 3개의 돌방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다시 32개의 작은 돌덧널들이 배치되어 있다. 주피장자는 장신구·무기·투구·마구·토기류 등과 함께 으뜸돌방에 매장되어 있으며 나머지 돌방과 돌덧널에는 피순장자들과 껴묻거리가 묻혀 있었다. <출처:브리태니커>


지산동 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인 47호 고분입니다. 봉분의 직경이 49m로 대가야 15대왕 이뇌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순장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안내표지판>


지산동 고분중에서 거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45호분입니다. 장신구류, 무기류 및 각종 마구류가 출토된 고분입니다.


45호분도 44호분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2기의 돌방과 이를 중심으로 하는 11개의 돌덧널로 구성되어 있다. 으뜸돌방에서는 초화형금동관(草花形金銅冠)·금제귀걸이[金製耳飾]·목걸이[頸飾] 등의 장신구류, 삼엽문환두대도(三葉紋環頭大刀)·쇠투겁창·쇠살촉 등의 무기류, 비늘갑옷편, 안장꾸미개[鞍金具]·발걸이·재갈·말띠드리개[杏葉] 등의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44호분과 45호분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순장했다. 지산동고분군의 중심 연대는 대략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있으며 이 시기는 대가야의 전성기에 해당된다.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고분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분산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고분들입니다.


고분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대가야 고분들입니다.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이 있는 능선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고령 시가지입니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고령을 들어오는 길입니다.



사적 제79호. 고령은 삼국시대에 대가야(大伽耶)가 위치했던 지역으로서 당시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지산동고분군이 무덤의 입지나 규모 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가야 최고지배자들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큰 무덤들은 주산(主山)의 능선을 따라, 작은 무덤들은 경사면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1977~78년에 걸쳐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 발굴단에 의해 44호분과 45호분이 발굴·조사되었고 이어서 1978년에 다시 계명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32~35호분과 여기에 포함된 다수의 유구들이 조사되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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