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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다산초당을 꼽는다면, 인물은 아마도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영랑 김윤식일 것이다. 강진읍내 군청 뒷쪽편 언덕아래 자리잡고 있는 규모가 상당히 큰 저택이다. 이런 저택이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다른사람을 의식해서 사치를 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고, 건물자체는 복잡하지 않게 되어 있다. 사랑채 마루에 서면 강진읍내를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마당에는 시인 영랑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곳에 모란을 심어놓고 있는데 잘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영랑생가의 안채. 초가지붕을 하고 있지만, 전체 구조는 일반 기와집 한옥과 같은 형태로 보인다.
영랑생가 사랑채. 건물 앞에는 작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영랑생가 들어가는 대문과 행랑채
마당에 심어진 모란꽃. 일반 주택의 마당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며, 영랑을 강조하기 위한 작위적인 느낌을 많이 준다.
영랑생가 뒷편의 동백나무와 소나무 숲. 전남 남해안 저택이나, 사찰 등에서는 집 뒷편을 이런 형태로 많이 꾸며놓고 있다.
사랑채 앞 정원에 심어진 오래된 은행나무. 영랑의 글에도 등장하는 나무라 한다.
영랑생가 들어가는 입구. 시비가 놓여져 있다.
영랑생가 입구.
이 집은 한국 근대 문단의 거성, 모란의 시인 김윤식 선행의 생가이다. 1903년 이 곳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선생은 1920년 일본으로 거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입학하여 용아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현재 보전되어 있는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 12월 강진군에서 이를 매입하여 1986년 2월에 지방 기념물로 지정.관리하였다. 이후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2년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2007년 10월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출처: 강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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