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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강릉 선교장,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99칸 대저택

younghwan 2010. 9. 1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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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오죽헌에서 경포호수로 가는 길에 있는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99칸의 대저택인 선교장이다.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시킨다고해서 집주인인 조선시대 이내번이라는 사람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안채만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집이었으나, 그 후로 계속 증축이 이루어져서 지금의 99칸 대저택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 선교장은 일반적인 대저택과는 그 구조가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강릉지역을 찾아오는 많은  고위층과 선비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방이 많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원의 별당인 활래정을 비롯하여 중심이되는 사랑채인 열화당을 비롯하여 사랑채가 여러동 있고, 그것도 부족해서 인지 안채와 별당, 행랑채에도 많은 방을 두고 있다. 보통 대저택의 경우 하인들이나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을 위해서 행랑채를 많이 두지는 않는데 이 곳 선교장의 행랑채는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강릉 선교장 전경. 송림이 우거진 낮은 동산을 뒤로하고 여러동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사랑채를 출입하는 대문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고, 안채 출입문은 별도로 두고 있다. 전면에 길게 행랑채들을 두고 있다.


선교장 입구에는 창덕궁 후원의 연못을 본떠서 만든 큰 연못과 별당겸 정자인 활래정이 자리잡고 있다. 활래덩은 궁궐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물위에 떠 있는 누마루를 두고 있는 정자로 온돌방과, 다실도 두고 있는 별당 역할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연못은 선교장 서쪽 봉우리에서 연못을 거쳐 경포호수로 빠져 나가는 활수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구한말에 세워진 이 건물은 당시에 유행하던 많은 한국 건축양식들이 대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강릉 선교장 정문격인 사랑채를 출입하는 솟을대문. 동쪽으로 안채를 출입하는 문이 별도로 있다.


솟을대문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 행랑채. 하인들이 머무는 방이 아니라 선교장을 찾은 손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보인다.


행랑채 내부.



행랑채와 안채를 연결해 주는 작은 문과 안채 출입문


이 곳 선교장에서 제일 어른이 사용하는 사랑채인 열화당. 1815년에 건립된 건물로서 선교장 주인 남자의 거처로 앞면 4칸에 누마루와 테라스를 두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구한말에 지어진 이 건물은 건물에 붉은 벽돌을 사용하는 등 구한말에 지어진 궁궐건물의 형태를 많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열화당은 '일가 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열화당 동쪽편에 있는 중사랑은 5칸의 건물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서별당과 연지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이 곳 서별당에도 손님이 많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 주인이 주로 머물렀던 동별당. 안채 앞에 있으며 일반적인 사랑채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선교장 안채. 이곳에도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선교장 동쪽편은 주인이 주로 거주하는 영역으로 안채주옥과 부속건물, 동별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안채 뒷편 언덕에 있는 사당


선교장 동쪽에 위치한 외별당. 분가할 자식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용도라 한다.


선교장 동쪽편에 위치한 곳간채


최근에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초가 마을. 아마도 선교장 일을 보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집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교장 서쪽편 언덕아래에는 현재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집이다.


선교장 앞에는 지금은 농경지로 변했지만 원래 호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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