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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아산 외암민속마을

younghwan 2010. 9. 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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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시가지에서 남쪽편으로 공주방향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외암민속마을이다. 조선시대부터 예안이씨가 이 곳에 정착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깊은 마을로 양반집 대저택부터 작은 초가집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남아 있다. 외암마을 남쪽으로는 차령산맥이라는 큰 산줄기가 지나가는 산악지대이고 북서쪽으로는 아산만을 중심으로 내포평야라는 큰 평야지대가 펼쳐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중부지방에서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양반촌이다.

 외암마을 입구에는 제법 큰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약간 경사진 언덕을 따라서 초가집과 기와집이 모여있는데, 각 집마다 돌담을 두고 있어 정겨운 돌담길을 형성하고 있다. 외암마을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관광객이 많이 찾는 편인 것 같고 그래서인지 주민들이 이를 성가시게 여겨서인지 대부분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어 사는 모습과 가옥들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다는 것이 약간의 아쉬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마 마을 돌담길을 따라서 있는 작은 하수도에도 맑은 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외암민속마을은 뒷쪽으로는 낮은 동산이 있과 앞으로는 맑은 개천이 흐르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있는 물래방아.


외암민속마을 입구에 있는 기와집 행랑채.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는 아니고 서울 도심 주택처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작은 초가집부터 큰 저택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주택들이 돌담길을 형성하고 있다. 옛마을임에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다.


아산 건재고택. 외암마을의 이름에 있는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외암 이간선생이 출생한 가옥이라고 한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고, 담장이 높아서 내부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외암민속마을의 종가댁. 사랑채가 대문 밖으로 나와 있다.


종가댁 바로 옆에 있는 사당.


방2칸, 부엌과 광으로 구성된 초가집. 전형적인 당시 중간층 농민의 집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슷한 규모이지만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는 집.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대저택.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의 건물로 되어 있어며, 안채는 앞면 7칸으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이 저택 입구인 솟을대문과 행랑채. 마당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고 있다.


또 다른 대 저택으로 앞면 5칸 규모의 한옥 건물과 부속 건물인 여러동의 초가 건물이 있다.


초가집 바로 옆으로 논이 있다.


외암민속마을 초가집



설화산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호를 ‘외암’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영암댁·참판댁·송화댁 등의 양반주택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상당부분 원래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초가 역시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의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한 마을에 전통적인 수법의 상류·중류·서민가옥이 함께 남아있어 마을의 형성이나 전통가옥의 연구에 매우 가치가 있다. 또 설화산에서 시작된 냇물이 마을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정원은 매우 특색있고 운치있어 마을 전체가 귀중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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