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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논산 명재고택, 조선후기 유학자 윤증 선생 고택

younghwan 2012. 2. 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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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향교가 있는 교촌리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후기 유학자 명재 윤증의 고택이다. 이 저택은 'ㄷ'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형 형태를 하고 있으며, 솟을대문이나 행랑채를 두고 있지 않어 검소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을 처음 지은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조선 숙종대에 처음 지은 것을 후대에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본채만 남아 있지만 원래 바깥쪽에 별채 형태로 초가집들이 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건물 왼쪽편에 초가집 1동을 복원해 놓고 있다. 건물 앞 마당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으며 작은 샘과 섬이 있는 장방형의 연못을 두고 있다. 건물 뒷편에는 최근에 복원한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앞에는 많은 장독들이 놓여 있는 마당이 있다.

 윤증(1629~1714)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송시열 중심으로 한 주도세력이었던 노론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던 소론의 영수로 알려져 있다. 윤증은 송시열 문하의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과거 시험을 통하지 않고 당대 문인들의 천거로 내시교관에서 우의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직을 임명받았으나 실제로 관직에 나아간 적은 없다고 하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상소로서 의견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의견과 행동은 당시를 주도하던 노론을 견제하였으며, 이는 병자호란 이후의 국제관계에 대한 의견차이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그는 송시열의 대명의리론에 반하여 중국관계에 대해서 실리적인 면을 주장했으며, 영.정조대에 사도세자 문제 등로 노론과 대립했던 소론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인물이다.



노성산성 아래 향교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논산 명재고택. 'ㄷ'형의 안채와 '-'형의 사랑채를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ㅁ'형태를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ㅁ'형 주택에 비해 안채의 규모가 크고, 안마당도 넓은 편이다.


명재고택은 별도의 대문과 행랑채를 두지 않는 대신 연못과 샘이 있는 넓은 마당을 지나서 안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명재고택 앞 마당에는 천방지원을 구현한 장방형의 넓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명재고택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 지역 공교육기관인 노성향교와 같이 사용하는 연못이라고 할 수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길 옆에 있는 작은 샘물


이 집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ㅁ'자형 주택에 비해 규모가 큰편이기 때문에 대문 왼편에 담장을 쌓아 외부와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안채 담장. 안채는 약간 경사진 지형에 낮게 축대를 쌓고 건물을 지었다.


대문채는 2칸은 중문과 행랑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문에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자벽을 두어 꺽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명재고택 안채 내부. 중앙에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을 배치한 'ㄷ'형 건물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는 가운데 5칸, 양쪽으로 3칸씩 건물을 달아내어 놓은 형태이다. 양족에 많은 방들이 배치되어 있어, 대가족이 살았던 건물로 보인다.


중앙의 대청마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상당히 넓은 규모이며, 뒷쪽에 판문을 달아서 통풍이 잘되도록 하고 있다.


부엌과 방들이 배치된 동쪽편 날개건물.


잘 다듬은 석재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진 사랑채. 앞면 4칸으로 양쪽에 마루와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로 19세기 유행했던 건물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랑채 왼족편 누마루. 앞면에는 정자같은 느김을 주는 1칸 정도의 누마루가 있고, 안채와 연결되는 안쪽에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 오른편 1칸은 뒷쪽에 판문이 달린 대청마루가 있으며, 손님을 주로 맞는 공간인 것으로 보인다.


명재고택 사랑채 전경


사랑채 뒷편에 위치한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 이 건물은 멸실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당 앞쪽에는 많은 장독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런 풍경은 전통 한옥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었는 풍경이리기 보다는 최근에 전통음식과 장독대를 강조하는 의미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이는 안채 앞쪽편에 있는 4칸짜리 초가집. 이 초가건물은 소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류층 이상이 살았던 잘 지어진 초가집이라 할 수 있다.


마당 오른편 언덕에는 전통문화를 교육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논산 명재고택 전경. 고택 뒷편에는 삼국시대 백제가 처음 쌓은 테뫼식 산성인 노성산성이 있다.


노성향교 입구에서 본 명재고택 전경.



논산 명재 고택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윤증(1629~1714) 선생의 고택이다. 고택을 향하여 왼쪽에 장방형의 연못이 있고, 중앙 부분에는 심애 대지보다 낮게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평면이 'ㄷ'자형으로,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사랑마당과 바깥마당을 주변에 두었고, 안채의 남쪽에는 행랑채가 위치하고 있어, 전체 구조는 'ㅁ'자형을 이룬다. 안채의 오른쪽 뒤편에 사당이 있으며, 안채의 앞에 사랑채가 위하고 있는데, 행랑채나 대문이 없고 전면 개방되어 있다. 사랑채는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청.누마루.고방 등의 짜임새가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대체로 중부지방 양식을 따르면서도 남도풍을 가미한 특이한 형태이다. 사랑채 앞의 축대와 샘, 연못과 나무에는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이 스며 있으며, 뒤안의 장독대와 울창한 숲은 우리나라 살림집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우리 지방의 양반가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출처:논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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