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진주도심 남강변이 있는 성곽으로 둘레 1.7km의 내성과 4km의 외성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성곽이다. 경상도 남해안에서 섬진강을 따라서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교통로을 지키는 요새로 삼국시대 백제가 토성을 쌓은 이래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2차례에 걸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1차 진주성싸움은 김시민장군의 지휘 아래 3,800여명의 군사로 2만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이다. 2차 진주성싸움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주력부대가 호남평야를 장악하기 위해 5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벌인 싸움으로 비록 황진.최경회가 이끄는 관군과 김천일이 지휘하는 의병이 모두 순국한 끝에 패전한 전투이기는 하지만 왜군의 기세를 꺾고 손실을 입혔던 전투이다.
조선후가 경상우병영이 주둔했던 진주성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관민을 기리는 사당인 창렬사와 의기 논개를 기리는 의기사가 있고, 당시 공적을 기리는 비석들이 성내 곳곳에 남아 있다. 진주성 서장대 아래 호국사와 나란히 있는 창렬사는 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국한 이들을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의병장 김천일, 병마절도사 황진과 최경회를 비롯하여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고종대 서원철폐령 이후 김시민 장군도 함께 모시고 있다고 한다. 진주성 성곽과 명소인 촉석루와 함께 진주성을 둘러보면서 임진왜란 당시 싸웠던 사람들의 업적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유적들이라 할 수 있다.
진주 창렬사, 경남 진주시 남성동
창렬사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선조 40년(1607) 국왕의 사액을 받았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어지게 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다. 지금 이 사당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 등 심진왜란 때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모두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분들로서 이름이 천추에 빛나고 있다. <출처:진주시청>
진주성에서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한적한 장소인 서장대 아래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창렬사.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국한 이들을 위해 세워진 사당이라 할 수 있다.
창렬사 외삼문
창렬사 내삼문
창렬사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3동의 사당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사당에 모셔진 신위
왼쪽편 사당과 신위
오른쪽편 사당과 신위
창렬사 사당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비석들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건물
진주성 서문 안쪽 큰 길. 승병들이 거처하던 사찰인 호국사와 사당이 창렬사가 나란히 있다. 호국사 또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 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에서 지평 충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군기시 판관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목사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고성.진해.지례.금산 등지에서 승전고를 올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힘하여 눈물짓다가 39세를 일기로 이곳 진주성에서 순절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에 추록된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출처:진주시청>
공북문 안쪽 광장에 세워진 김시민 장군 동상
진주성 동문 안쪽 마을이 있었던 넓은 광장에 남아 있는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
김시민장군 전공비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로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천명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출처: 진주시청>
김시민 장군 전공비
촉석정충단비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 6월19일~29일 사이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러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여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싸움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카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3년(1686)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출처:진주시청>
촉석정충단비
옛날 민가가 있던 넓은 광장 안쪽 언덕에는 최근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광장 한쪽편에 있는 호국의 종
관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고목들을 성곽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쌍충사적비,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을 새겼다. 제말장군은 징비록에 경상도 고성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웅천.김해.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장군과 함께 그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싸움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를 따라 공을 세운 후 이순신장군 휘하에서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정조 16년(1792) 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어 이조판서 서유린에 명하여 비문을 지어 쌍충각을 촉석루 옆에 세웠다. 일제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 <출처:진주시청>
촉석루 서쪽편 의기사와 나란히 있는 쌍충 사적비
쌍충사적비
진주성 안쪽에 남아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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