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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289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 백자, 순백의 아름다움

백자는 분청사기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이다. 분청사기가 조선전기인 16세기까지 150년 정도 만들어진 것에 비해서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기간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조선 백자는 다양한 형태와 무늬들이 있는데 그 중 순수한 흰색의 자기를 순백자라고 한다. 유교사상이 사회전반을 지배한 조선시대에서 순백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백자는 검소와 절제를 중요시하는 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졌으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 까지 순백의 도자기들이 크게 선호되었던 점이 백자가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도자기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취향의 백자와 서민 취향의 분청사기가 전국적으로 같이 만들어졌으나, 15세기에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

중앙박물관 2011.02.17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분청사기의 발전과 쇠퇴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도자기제작기법으로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20세기에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초에 많이 사용되었던 분청사기는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고도 할 수 있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15세기로 왕실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도자기이다. 고려 청자가 주로 귀족층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량생산을 했던 것에 비해서 분청사기는 고려말 전국적으로 확산된 가마터 덕분에 대량생산되었다고 하며, 그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양질의 것과 일반적인 것과는 수준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 각지에서 약 150여년간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세계적으로 순백의..

중앙박물관 2011.02.16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초기 분청사기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하는 도자기로 그 기술의 근원은 고려시대 상감청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도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만들어진 시기가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청사기는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어, 고려청자, 조선백자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주로 민간에서 운용하는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광주지역에 관..

중앙박물관 2011.02.15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 상감청자의 발전

고려청자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것은 아마도 고려 상감청자일 것이다. 상감청자는 바탕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에서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시대에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제작기법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감무늬를 만든 후 고온의 가마에 구우야만 했기때문에 재질의 차이 등으로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상감기법은 12세기에 그 기술의 절정을 보였다고 하며, 상당히 많은 수작들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많은 도자기들이 이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만든 도자기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비색과 함께 세계적으로 그 기술과 예술성을 인..

중앙박물관 2011.02.15

[중앙박물관 도자공에실] 고려후기의 청자

고려후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적으로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이다. 이는 청자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전성기의 청자에 비해서 고려후기에는 그 제작수법의 단순해졌으며, 이전의 세련된 기술들이 많이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중기 청자기술의 발달이 남송과의 교역 등을 통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약해짐으로써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고려후기 해안지역에는 일본의 왜구가 서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여 고려청자를 만들던 가마들이 있었던 전남 강진과 전북부안의 장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도자기 생산의 새로운 거점이 생기고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용어리..

중앙박물관 2011.02.14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 전성기의 도자기

고려시대 도자기의 제작은 차문화의 확산과 관련이 깊으며, 초기 가마터에 출토된 유물 중에는 차을 마시는 찻잔인 완의 비율이 50%를 넘기도 한다. 고려의 자기문화가 가장 세련되게 꽃피었던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국보로 지정된 고려청자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는 완이 주로 만들었으나 중기에는 매병, 향로, 주전자, 베개 등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가 만들어 졌으며 그 형태나 빛깔에 있어서도 고려청자 고유의 특징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 또한 개경 중심에서 전북 부안, 전남 강진 등의 가마에서 우수한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중국 남송과 일본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그 교역로 중간에 위치한 전북 부안이나..

중앙박물관 2011.02.13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의 자기문화, 비색청자

우리나라에서 자기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인 9~10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당삼채에서 시작되어 당나라때 청자가 만들어졌다고 하며, 통일신라말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에서 수입한 것들을 일부 계층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황소의 난에서 시작된 당나라 말기의 혼란상을 피해서 우리나라로 넘어온 중국 기술자들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들이 있는데 세계 문화 교류를 돌이켜 보면 크게 무리가 없는 주장인 듯 하다. 고려 초기의 가마들은 수도 개경을 부근에서 중국 월주요의 자기들을 생산했다고 하며, 11세기에 들어서는 중국 송나라와 ..

중앙박물관 2011.02.12

[중앙박물관 조선실] 대한제국의 흔적들

중앙박물관 조선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구한말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역사를 말해 주는 유물들이다. 박물관에서는 구한말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를 근대화를 향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데, 그렇더라도 구한말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보면 그렇게 좋은 기분을 주지는 않는다.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는 유물로 그가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 중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세웠던 척화비가 전시되어 있고, 외세와 기득권에 저항한 농민운동인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사발통문을 전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대한제국의 성립과 근대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한말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중국 정세를 당시 집권층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했는지에 대한 유물들과 당시 집권세력의 ..

중앙박물관 2011.02.09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후기 신분의 변화와 여성들의 생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를 거치면서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기득권층인 양반.권문세가는 상속을 통한 경제력분산을 막기 위해 장자위주의 상속으로 부의 집중화를 추구하였으며, 기득권에서 소외되는 양반계층도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반면, 양반과 양인의 중간계층인 중인이라 불리었던 양반의 서자, 서리, 기술직 등은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여 부를 축적하고 구한말 근대화 시기를 주도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의 삶은 조선후기의 정착된 장자상속제 등의 변화에 따라서 조선전기에비해서 사회적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여자들의 삶은 모습은 대부분 조선후기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앙박물관 2011.02.08

[중앙박물관 조선실] 서울과 지방, 조운과 조창

조선시대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와 사회, 과거제와 관료제, 붕당정치 등을 위주로 하기때문에 지방의 통치조직이나 통치제도에 대해서 논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특히, 조운과 교통로, 도시의 발달과 역할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작년에 개편된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시대 지방통치와 조운, 교역과 상업의 중심이었던 나루와 포구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전시된 내용 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을 들 수 있다. 옛말에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이라는 말이 실감할 수 있는 화려한 잔치그림이다. 여러 문헌과 연구자료 등에서 조선시대 관료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의 근간이 되는 지방수령들..

중앙박물관 2011.02.07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후기 실학, 북학과 연행

실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대두된 현실개혁적인 조선시대 유학의 학풍을 말한다. 당시 청나라의 고증학과 더불어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에 그 근원을 두고 양국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청대의 고증학은 경서의 해석에 치중한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서구문물의 영향과 함께 농업에서 부터 사회전반의 개혁을 추구한 학문으로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서는 조선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각종 저서들을 실제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조선실을 개편하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저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 실학의 시초라 여겨지는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요약한 성호사설..

중앙박물관 2011.02.06

[중앙박물관 조선실] 영조의 탕평정치와 정조대 문화의 진흥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병자호란 이래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계속되어온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영조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과 권위로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심으로 안정화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정조대를 대표하는 정책으로는 탕평책으로 대변되는 당쟁의 극복과 왕권의 확립,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조세개혁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학문장려, 중국 문물됩과 함께 크게 융성한 실학, 대량 출판을 통한 지식의 확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

중앙박물관 2011.02.04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후기 민간생활과 놀이문화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실에 전시된 조선후기 민간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조선시대 민간에서 즐겼던 놀이문화와 의.식.주 관련하여 각종 생활도구, 민간신앙 등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 놀이문화로 특색적인 것은 조선시대를 특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관료제를 들 수 있는데 양반가에서는 어린시절부터 승경도라는 놀이를 통해서 관직의 체계를 배우고, 입신양명의 꿈을 갖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서민층에서 사용했던 놀이기구는 아마도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특별히 전시된 것은 없다. 당시의 놀이로는 서민들이 즐겨 놀았던 장기나 양반 계층이 즐겼던 바둑.쌍륙.투호.승경도와 같은 놀이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서구로부터 도입되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린 담배. 떡에 무늬를 찍어내는 도구..

중앙박물관 2011.02.02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후기 경제와 산업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조제제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민간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각지방이 특산물을 정부에 납부하던 공물을 대동미라는 명목으로 쌀로 납부하게 하는 대동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동법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처음으로 경기지역부터 적용했다고 숙종때 전국적으로 시행했다고 한다. 전국적 시행에 100년 이상이 걸린 엄청나 지방토호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있었던 제도이다. 지금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현상이지만, 조선의 관료제도나 사회제도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 집안을 운영하는 경제력의 기반으로는 부족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 2010.12.25

[중앙박물관 조선실] 병자호란과 그후, 붕당정치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각국에는 크나큰 변화가 발생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중앙집권적인 동경중심의 막부정치가 시작되었고, 북방에서는 만주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여 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허약함을 드러낸 국왕과 집권층에서는 중립외교를 추구한 광해군을 축출하고 명분론적이며 친명을 표방한 서인세력이 집권했다. 인조대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에 허망하게 굴복하고, 명나라 또한 농민혁명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 정립되었다. 병자호란은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허무하게 북방민족에게 굴복한 사례라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병자호란을 상징하는 유적이나 유물이 남한산성이나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별로 찾아 보기 힘든 형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중앙박물관조차도 병자호란..

중앙박물관 2010.12.24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의 대외교류와 임진왜란

조선 전기 동아시아는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북방의 몽골과 여진, 한반도의 조선 그리고 일본이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는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를 하였고,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괴롭혀 왔던 일본은 조선이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격책과 삼포개항 같은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혼란기인 전국시대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하고 한반도를 침범함에 따라 동북아 질서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으며, 조선과 명나라는 상당한 국력을 소비하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이 발생했으며,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가 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당시 조선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앙박물관 2010.12.24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전기 양반 사회 생활모습

조선전기 양반사회의 모습은 선비들이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고, 관직에 입문해서 관직생을 하다가 낙향해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당시에 양반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물과 유적 또한 그들이 읽었던 서적들, 과거시험에 합격했음을 알려주는 홍패.백패, 관직 임명장인 교지, 그들이 정책에 대한 글을 올린 상소문, 일생을 정리하면서 정리한 각종 일기와 문집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런 유물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양반의 일생에 관련된 문서 이외에도 당시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 자녀들 사이에 유산상속을 정리한 분재기, 관가에 등록한 호적, 지방사회를 교화시키고자 만든 향약, 계모임을 묘사한 그림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2010.12.21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전기 성리학과 사림정치

조선전기 성종대부터 신진관료 세력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연산군대와 중종, 명종대에 걸쳐서 여러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었다. 중종대 조광조가 성리학을 조선에 맞게 변형시키고 이를 현실정지에 적용하는 도학정치를 주장했다. 조광조 이후에 이황.조식.이이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계승하여 성리학을 현실정치에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다향한 학파가 형성되면서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중기 사림정치를 이끈 조광조선생의 문집, 이황 선생의 성학십도, 이이 선생의 성학집요를 전시하고 있어서 조선을 이끈 대표적인 학자이자 사상가의 발자취를 볼 수 ..

중앙박물관 2010.12.19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왕조와 불교, 양주 회암사지 출토 유물

유교국가를 지향한 조선왕조는 억불정책을 근간으로 국가를 운영했지만, 삼국시대부터 국민들의 생활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특히, 조선의 개국에 크게 공헌한 무학대사, 월인석보상절을 저술하는 등 불교를 크게 후원한 세조, 조선중기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오늘날의 불교를 있게 만든 중종의 계비인 문정황후 등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는 국가적으로 후원을 받은 양주 회암사, 세조가 크게 중장한 오대산 상원사, 왕릉을 지키면서 선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 등을 두어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게 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왕실과 관련된 불교 유물로 회암사 절터에서 출토된 청동금탁, 기와, 잡상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할 유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

중앙박물관 2010.12.18

[중앙박물관 조선실] 세종대의 과학기술과 한글 창제

조선전기 세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은 천문학은 물론 수학, 도량형, 의약학, 농학, 화약과 무기제조 등 모든 과학 기술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발전은 우리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표의 문자인 한자를 대신한 표음문자를 사용할려는 의도는 신라시대 이두를 비롯하여, 일본어, 북방유목민의 문자인 거란어,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시대가 있었고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한글만이 거의 유일하게 민가생활에 깊게 뿌리내리어 오늘날까지 공식적인 문자로 자랑할만한 발자취를 남겨오고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 전기의 과학업적을 대표할 만한 여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런 유물이 희귀하다보니 상당수는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태종때 만들어진 세계지도인 '혼일강..

중앙박물관 201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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